본문 바로가기
역사 이야기(124)

옥동 문익성(玉洞 文益成)

by 석암 조헌섭. 2013. 3. 16.

옥동 문익성(玉洞  文益成)

문익성(文益成, 1526∼1584)의 자는 숙재(叔栽)이고, 호는 옥동(玉洞)이며,
본관은 남평(南平)으로 합천(陜川)에 거주하였다.
그는 1526년에 진사 옹(翁)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문집은 {옥동집(玉洞集)}이 있다.

8세 때(1533년) {소학}을 공부하였다.
13세 때(1538년) {대학}을 공부하고, 경(敬)을 요체로 삼았다.
17세 때(1542년) 주세붕(周世鵬)에게 학문을 배웠고 당시 한 마을에 살던
주이(周怡) 등과 더불어 학문을 연마하였다.

주이는 주세붕의 종질로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 벼슬을 지내고 만년에
고향에 호연정을 지어 학문에 힘썼던 선비였다. 
18세 때(1543년) 배우기를 즐겨하였으며, 오경(五經)에 능히 통하였다.

23세 때(1548년) 시서(詩書)를 강(講)하였다. 

24세 때(1549년) 식년 생원에 제3등, 진사에 제2등으로 합격하였고({司馬榜目}),

25세 때(1550년) 남명선생을 뵙고 가르침을 청하였는데 이는 평소 부친의 명을
     따른 것이었다. 

27세 때(1552년) 두 형과 더불어 산해정(山海亭)에서 {예기}, {춘추} 등의
    책을 공부하였다.
문익성이 27세 때라면 남명선생이 삼가 토동에 살 때인데,  문익성이
1550년에 삼가 토동으로 찾아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33세 때 남명선생의 [유두류록]을 읽었다.
1550년(경술)에 남명선생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오건, 하항 등과 더불어 각별하게 지내면서 학문을 연마하였고, 10월에 옥동정사(玉洞精舍)가 완성되었다.



35세 때(1560년) 남명선생의 여러 제자들과 {심경}, {근사록}, {시경}, {서경},
   {역경}, {춘추} 등의 책을 읽었는데, 이 때 남명선생이 문익성의 힘써 배우고자
    하는 모습을 보고 칭찬을 하였다.

36세 때(1561년)초당(草堂) 허엽(許曄)선생을 찾아 뵙고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해(1561년) 9월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37세 때(1562년) 덕천동 산천재로 남명선생을 찾아가 성현들의 마음 공부에 대해        배웠다.  이 때 남명선생이 항상 지니던 칼에 새긴 명(銘)을 보여주면서
    경의(敬義)의 뜻을 깨우쳐 주었다. 

 

38세 때(1563년) 퇴계선생을 찾아 뵙고 {대학}의 명덕(明德), 신민(新民)의
    속 뜻을 배웠다. 
1563년) 10월에 첫 벼슬로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를 제수받았다.
외교문서를 맡아보는 관청이라 뛰어난 글재주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벼슬하기
힘든 자리였다.  이 후 승문원 정자(正字) 박사(博士) 등의 벼슬을 하였다. 

 

41세 때(1566년) 홍원현감(洪原縣監)으로 나갔다.  홍원은 함경도지역에 있는
    변방이었다.  여기서 고을의 자제에게 독서를 장려하고 또 향교에 이들을 모아
    강회(講會)를 열기도 하여 풍속을 교화하였다. 

44세 때(1569년) 김우옹, 정구(鄭逑) 등과 더불어 학문을 강마하였다. 

50세 때(1575년) 양양에서도 관내 자제들을 모아 향약(鄕約)의 약조를 가르치고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풍속을 장려하였다. 
    이 때 양양 사람들이 문익성의 공적을 기리는 비(碑)를 세웠다. 

1575년, 양양도호부사로 있으면서 두 아들과 한계령을 유람하였는데,
  이 때의 유람을 기록한 [유한계록(遊寒溪錄)]이 문집에 전한다.

1575년, 헌납(獻納)의 벼슬을 거쳐 양양도호부사(襄陽都護府使)로 나 아갔다.

54세 때(1579년) 나주목사를 제수받았으며, 
59세 때(1584년) 숙천도호부사(肅川都護府使)의 벼슬을 제수받았다. 
56세 때(1581년) 고향으로 돌아와 와룡정(臥龍亭)을 짓고 여기서 만년을 보내고자      하였으나
59세 때(1584년) 임지인 숙천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도승지겸직제학을 추증받았으며,
    경상남도 합천의 도연서원(道淵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