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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124)

장희빈 (장소의(張昭儀)1659,?-1701년

by 석암 조헌섭. 2013. 4. 12.

수정 2018년 5월 4일

   

     장희빈 (장소의(張昭儀) 1659,?-1701년

                               장옥정

 

 

조선 숙종의 빈(嫔) 장소의{張昭儀) 숙종은 오래도록 아들이 없다가 궁녀 소의를

가까이하여 1688년 (숙종 14년)에 왕자 {윤昀) 경종(景宗) 낳았다.

 

왕은 기뻐하여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으나 송시열 등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이

지지하지 않으므로 남인(南人)의 원조를 얻어 세자 책봉을 하려 하였다.

이에 서인의 노론 소론은 모두 아직 왕비 민씨가 나이가 많지 않으니 후일을 기다리

라고 하였다. 숙종은 이를 듣지 아니하고 1689년 정월에 균을 세자로 봉하고 장소의를

희빈으로 봉했다.

 

이에 송시열은 세자를 봉함이 아직 빠르다고 상소하니  왕은 이미 명호(名號)가 결정된

 다음에 이런 의견을 말하는 것은 무슨 일이냐고 분노하자 ,

南人 이현기(李玄紀), 남치훈(南治薰), 윤빈(尹彬) 등이 송시열(宋時烈)의 상소를 논박하여

파직시켜 제주도로 유배하고 다시 사사(賜死)게 하였으나 종로 정읍으로 이배{移配)

되었다가 사약을 받았다.

이밖에 서인의 영수들도 파직 또는 유배를 면치 못하였고 반면에 남인의 권대운(權大運),

김덕원(金德遠) 등이 등용되었다.

 

 기이 정권의 교체를 기사환국 또는 기사사화{己巳 士禍) 라고 한다.

이해 5월에 민비를 다시 폐하고 장희빈을 올리어 왕비를 삼으려 할 때 서인 오두인(吳斗寅), 

박태보(朴泰輔) 등 80여 명이 상소하여 이를 반대하였으나 도리어 참혹한

 형문을 받게 되니 이후 세상은 남인의 세상이 되었다.

 

기사 환국 후 시간이 감에 따라 숙종은 페비 사건을 후회하게 되었다.

그러자 1694년 서인 김춘택(金春澤), 한중혁 등이 폐비 복위를 꾀하다가 고발되었다.

이때 남인의 영수요 당시 우상으로 있던 민암 등이  이 기회에 서인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김춘택 등 수십 명을 하옥하고 범위를 넓혀 일대 옥사를 일으켰다.

 

 이때 숙종은 폐비에 대한 반성으로 옥을 다스리던 민암을 파직하고 사사(賜死)하였으며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 등을 유배하고  소론(少論)의 남구만, 박세체, 윤지완 등을 등용하고

장씨를 희빈으로 좌천하여 이것을 갑술옥사(甲事)고 한다.  

 또한 이미 죽은 송시열, 김수항, 등을 다시 복작(復爵) 시키고 남인은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소론이 들어서고 남인이 물러나게 될 때 희빈의 오빠 장희재(張希載)가 희빈에게 보낸

서장(書狀) 속에 폐비 민씨와 관련된 문구가 논쟁이 되어 여러 사람이 장희재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세자에게 화가 미칠까 염려하여 남구만, 윤지완, 등이 용서하게 하였다.

그런데 후에 왕비 민씨가 죽은 다음에 장희빈이 취선당(就善堂) 서쪽에다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민비가 죽기를 기도한 일이 발각되었다.

이 일에 관련된 희빈과 장희재는 살해되고 궁인{宮人)과 무녀(巫女)의 가족도 화를 입게

 되었다.

 

이것을 무고의 옥(獄)이라 하는데 이때에 장희빈에 대한 관대한 태도를 취한 남구만,

최석정, 유상현 등 소론의 선비들도 몰락하게 되고 다시 노론이 득세하여 숙종은 이후

 빈어(嬪御)에서 후비(后妃)로 승격되는 일이 없게 법을 만들었다.

 

파란만장 한 삶을 살다 간 장희빈은 궁녀에서 희빈을 거쳐 중전이 되었다가 다시

 후궁으로 내려앉고 결국 사약을 받고 죽은 여인 ,

그의 묘소는 경릉을 지나 홍릉 오는 좌측 서오릉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조 최고의 악녀로 알려진 장희빈과 현모양처(妻)의 대명사로 존경받던 

인현왕후의 관계였다.

숙종을 사이에 둔 이 두 여인은 악연은 단지 여자의 시기가 아닌 서인 남인의 당파싸움

이었고 이는 결국 수차례 걸쳐 국정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민비 폐비 조치를 반대하다 남해로 유배되어간 김만중은 숙종을 참회시키기 위해

숙종과 인현왕후 장희빈을 풍자한 글(사시남정가)을 썼고 이는 순식간에 서인들에 의해

 백성은 물론이고  궁궐 내로 들어가게 된다. 숙종은 민심이 나빠지고 백성들이 인현왕후

(민씨)의 삶을 애석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장희빈은 또 다른 후궁 숙빈 최씨가 왕의 사랑을 받자 이를 시기(猜忌) 질투(嫉妬)하여

소란을 피우고 이에 숙종은 중전 장희빈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어 결국 민씨를 폐위시킨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한편, 다시 중전이 된 인현왕후는 희빈 장씨와 화해를 도모하려고도 하였으나 그는

1667-1701년 34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소생은 없으며 숙종과 함께 묻힌 그의 능은

 경기도 고양에 있다.

 

예의 바르고 정숙했다는 평가를 들은 그를 대상으로 삼은 인현왕후전이 한 궁녀에 의해

소설화되기도 했다.

         2013년 4월 13일

  수정 2018년 5월 4일

           석암 조 헌 섭

       이선=가야금 병창 (심청가 중에서 방아타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