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이야기(124)

남명조식 선생의 사상(思想)과 철학(哲學).

by 석암 조헌섭. 2013. 2. 28.

  수정 2015년 7월 1일





남명조식선생 유적지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의 사상과 철학.
 
남명사상(南冥思想)은: 수기치인(修己治人), 실천궁행(實踐躬行)으로
"몸소 갈고닦은 것을 실제로 행동에 옮긴다"는
실천유학(實踐孺學)을 강조했으며,

남명 철학(哲學)은:경(敬)과 아울러 의(義)를 강조한 경의협지로 "경(敬)으로써
내면을 밝혀 마음을 곧게 하고 의(義)로서 행동을 결단하여 모든
사물을처리해 나간다,는 생활철학(生活哲學)을 견지하였으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당시 사회 현실과 정치적 모순에는 적극적인
비판의 자세로 임하였다.
 
남명 선생을 문인들이 평하기를......
 
한강 정구(寒岡 鄭逑대사헌):선생의 기질은 태산교악(泰山喬嶽)으로 행동이
                           태산과같이 크다 하였고,
 
동강 김우옹(東崗 金宇顒대사헌);성정은 추상열일(秋霜烈日)로 가을의 서릿발이나
                                 여름의 태양처럼 엄정하고 권위가 있었으며,
 
미허목(眉受許穆우의정):선생의처세를불구종(不苟從)불구묵(不苟默)으로           
                        불의를 보고 구차하게 따르지도 않았고
                        구차하게 침묵하지도 않았다.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좌의정) :선생의 공덕은 입유렴완(立濡廉頑)으로
                                 나약한 선비를 강하게 만들었고 탐악한 관료들을
                                 청렴하게 만들었다고 하였으며,
 
율곡 이이(栗谷 李珥 이조판서) : 선비의 지조를 끝까지 지킨 이는 오직
                                이 세상 남명 뿐이라 하였고,
 
택당 이식(澤堂 李植 이조판서) :고고한 자세로 세상을 내려다 보았다고 하였으니
                                 진정한 처사야말로 나 뿐이야 라는
                                 말을 남겼을 만큼 우리 역사에 유일한 처사요
                                 가장 성공한 교육자로 평가 받고 있다.
 
 단성현감 사직소( 단성소 을묘사직소)
나라의 기틀은 무너졌고 민심이 떠난지 오래입니다. 높은 벼슬아치는 오직
재물에만 탐하여 물고기의 배가 썩어들어 가는데도 이를 바로 잡으려 하지
않습니다.
대왕대비는 세상 물정 모르는 바깥소식이 막힌 깊은 궁궐 안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는 선왕의 어린 아들에 불과할 뿐이니 천 갈래 만 갈래
 흩어진 민심을 어떻게 수습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라의 형편을 바로 잡는 길은 여러 가지 법령에 있지 않고 오직 전하께서
크게 한 번 마음 먹기에 달린 것입니다...... 라는 것이 상소문의 요지이다.
 
민암부(民巖賦)
"백성은 물이요, 임금은 물 위의 배에 지나지 않는 것. 배는 모름지기 물의
이치를 알아야 하고 물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지론을 거침없이 갈파한 남명(南冥) 벼슬아치는 가죽 위에 돋은 털에 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가죽을 벗기는 탐관오리(貪官汚吏)를 질타한
내용이다.

남명 조식은 상소문 단성소와 민암부에서 대왕대비(문정왕후)를 세상 물정
모르는 과부또는 아녀자라 하고 22세의 전하(명종)를 물 위의 배에 비유하며
어린애(고아)에불과하다고 했으며 벼슬아치는 백성을 껍데기를 벗기는
탐관오리만 한다고 하였으니,
 
왕조시대인데도 온 나라를 진동시킬 만큼 국정을 극렬하게 비판한
것은 조선조 500면 역사상 전무후무(前無後無)한 것이다.
 
남명이 이렇게 직방강직한 상소문을 올렸어도 포도청에 한 번 안 끌려 간
것을
보면 정말 대단한 분이라 생각된다.
 
남명[冥]선생의 김해 산해정[山海亭] 계명실에 자신의 정서적 이정표가 될
 좌우명[座右]을 보면,
용신용근[庸信庸謹]-말은 떳떳하고 미덥게, 행동은 떳떳하고 신중하게.
한사세연[閑邪存誠]-사악한 것 막아야 하고, 정성스러움 간직해야 하네.
악립연중[岳立淵沖]-산악처럼 우뚝하게, 연못처럼 깊게 하면.
엽엽춘영[燁燁春榮]-찬란히 봄꽃처럼, 피어나고 피어나리라.
        남명집 1권 32장
 
남명은 자신의 지조[志操]를 굳건히 지키며 불의를 용납하지 못하는
 천길 절벽 같은 기상[氣象]이 이 처럼 젊은 시절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남명이 31살 되던 해 어린 시절 죽마고우[竹馬故友]인 동고 이준경[영의정]이
심경이라는 책을 보내왔는데 남명은 귀한 책이라 책 뒤에다 이런 글을
썻다고
한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얻었을 때 흠칫하여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이책의 가르침대로  하지 못할까 염려되어 마치 큰 산을 짊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벽에다 좌우명을 써 붙히고 경계하려 했지만, 마음이 집중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사람이 자기 마음을 잃고서 육체[肉體]만 걸어 다닌다면
 금수[禽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가 이 책의 가르침에 따라 내 마음을 단속[團束]하지 못한다면,
이책을 선물한 내 친구를 저버린 것이 아니라 이 책을 저버린 것이 되고,
 이 책만 버린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저버린 것이 된다.
 
사람에게 가장 슬픈 일은 마음이 죽는 것이다. 이 책[冊]은 바로 마음을 죽지
 않게 하는 약이다. 이 책을 음식으로 삼아 그 맛을 알고, 좋아하여 그 즐거움을
 알아 오래도록 편안한 마음으로 일상샐활[日常生活]에 적용하기를 개을리하지
않는다면, 공자의 수제자 안자[顔子]처럼 자기의 사욕을 이겨서 인[仁]으로
 돌아가는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남명집 2권 31, 32장
 
친구에게 선물로 받은 책 한 권도 범상하게 여기지 않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서,
자신의 정신자세를 바로 세워 공부해 나갈 방향을 설정[設定]했던 것이다.
극기복례[克己復禮자기의 사욕을 이겨 예로 돌아가는 것]를 이룬 안자[顔子]의
경지에 이를 것을 기대 하였다.
  
남명에게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딸이 회령포 만호(萬戶) 김행
           (金行 정사품 문관직)에게 시집가서 두 딸을 낳았다.
           큰딸은 의성 김씨 김희삼(金希三)의 아들 김우옹에게 시집 보내고,
           작은딸은 현풍 곽씨 곽월(郭越) 아들 곽재우[郭再祐]에게 남명의
           주선으로 시집 보냈다.
남명의 외손녀는 심성은 올바르고 행실은 반듯했지만, 인물이 별로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성질이 날카로웠고 음식 솜씨, 바느질 솜씨는 더더욱 볼품이
없었다.

곽재우[郭再祐]는 본래 호걸다운 사람으로 성질이 급하고 괄괄했는데,
그 부인마저도 날카로웠으므로 결혼 초부터 두 사람 사이에 마찰이
 적지 않게 점점 그 정도가 심해지자 곽재우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이런 외손녀를 “군자의”라며 소개한 평소에 존경[尊敬]하던
 스승 남명이 야속하게 생각되기까지 했다.

그래서 곽재우는 어느 날 참다못해 남명에게 항의하기 위하여 가던 중 
뜻밖의 손위 동서인 김우옹[훗날 대사헌]을 만나 어쩐 일이냐 물어보니
사정이 자기와 똑 같아 김우옹도 동서와 함께 항의 하기 위해 갔었다.
 
남명을 찾아뵙고 인사를 올리고 나서 성미가 급한 곽재우가 먼저 

스승께서 추천을 하여 저의 앞날을 그르치려고 하십니까? 라고
따지듯 거칠게 항의하니 김우옹도 같이 항의했다. 

잠자코 다 듣고 난  남명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내가  “군자의 배필이 될 만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성질이 사납고 솜씨 없는 내 외손녀는 군자다운 사람이라야
 데리고 살 수있지.군자답지 못한 사람이야 하루인들 같이 살 수 있겠느냐?

내가 자네들을 군자다운 사람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혼사가 이루어지도록 했지.
자네들을 소인배로 보았다면 당연히 혼사를 말렸을 걸세. 하니
두 외손서는 더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남명의 일화 중 영남의 3선비라 불리는 남명 조식, 
황강 이희안(黃江 李希顔 고령현감 판관),

송계 신계성(松溪 申季誠) 중, 황강 이희안이 고령현감으로 있을 때 남명은
 자신의 도[道]를 행하지 못하면서 벼슬에 머물러 있는 것을 경계하여 고령을
 지나갈 적에는 관사쪽으로 부채를 펴 가리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1556년 황강 이희안[黃江 李希顔]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남명에게
 자신의 어머니 묘비를 부탁했다.

정부인 최씨 묘표(貞夫人 崔氏 墓 表)’가 전하는데, 남명은 비문에“나는 
고령현감 이희안과
 친하게 지냈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비석은 문화재로 지정을 해도 손색이 없을 비석인데도 무관심으로 방치되고 있다.

현재 비석에 낀 이끼들은 하나둘씩 늘어가지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황강정 바로 건너편인 쌍책면 오서리 골짜기에 황강정 주인 황강 이희안의 
묘소가 있다.
 
황강이
황강이 남명과 함께 학문을 연마한 황강정.
 
묘소 앞에는 글자가 마모되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오래된 묘비가 서 있는데, 남명이 500년 전에 지은 것이다.

‘군자감판관이군묘갈(軍資監判官李君墓碣)’ 군자감 판관 벼슬을지낸 이희안의 묘비라는 뜻이다. 황강이 1559년 이 마을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약 500년전에 세워진 비석임을 알 수가 있다.



 
 남명이 지은 제황강정사(題黃江亭舍]시

(路草無名死) 길 가 풀들 이름 없이 죽고
 
(山雲恣意生) 산의 구름 자유로이 인다.

(江流無限恨) 강물은 한 없는 한을 흘려보내며
 
(不與石頭爭) 돌과 다툴 일 없도다.
 
황강 이희안[黃江 李希顔]은 합천군 율곡면 전두환 전 대통령 생가 뒷편
 청계서원(淸溪書院) 에서 오늘날까지 추모하며 학덕을 기리고 있다.


 남명 조식 선생의 신명사도

2015년 7월 1일 수정

블벗님 저의 검색창에 -남명 조식 선생 일대기-를 쳐보세요 (상세한 내용 있음)


석암 조헌섭

남명조식선생의 문하생(133명)

이 명부는 덕천사우연원록"을 토대로 하여 만든 것입니다.
 
▼ 문인
오건(덕계)
최영경(수우당)
정인홍(내암)
정구(한강)
김우굉(개암)
김우옹(동강)
이제신(도구)
임운(첨모당)
배신(낙천)
송사이(신연)
최력
강익(개암)
이준민(신암)
정탁(약포)
이광우(죽각)
하항(각재)
문익성(옥동)
박제인(황암)
이천경(일신당)
정구
이조(동곡)
구변
이광곤(송당)
권문임(원당)
노흠(입재)
전치원(탁계)
임희무(남계)
곽율(예곡)
조종도(대소헌)
이염(운당)
하응도(영무성)
김효원(성암)
박찬(설봉)
권세륜(선원)
하진보(영모정)
이로(송암)
노순(매와)
김홍미(성극당)
조원(운강)
이정(모천)
성여신(부사)
유종지(조계)
이대기(설학)
곽재우(망우당)
손천우(무송)
이제신(청강)
 진극경(백곡)
하천주(신계)
신공필(정재)
이요
이순인(고담)
이희생(벽진)
오간(수오당)
송인(이암)
하락(하락)
김면(송암)
도희령(양성헌)
오운(죽유)
최황(월담)
유대수
정복현(매촌)
정지린(서암)
박제현(송암)
정유명(역양)
양홍주(서계)
방응현(사계)
김신옥(쌍봉)
양응용
김려
이욱(팔계)
박순(사암)
이양원(노저)
이산해(아계)
윤근수(월정)

정인기(문암)
박윤(죽연)
이종영(지봉)
최원(학곡)
박택(낙락당)
전유룡(호봉)
이창(추강)
신문빈(포연)
강서(매곡)
이담(한천)
허팽령(만헌)
권문현(죽정)
하위보
박계현(관원)
권문언
배기수(대황재)
정백거
김담수(서계)
 최여경(천민당)
이장영(죽곡)
변옥희(평천)
김대명(백암)
권유
정사현(월담)
유영순(북천)
권문저
강돈(관재)
정대방(동계)
강희(이재)
이길(검계)
배명원(월정)
박인량(만수당)
진극원(월와)
박이현(창애)
강렴(만송)(
정인상(구계)
최연
하종악(진사)
오현(의당)
허성(악록)
허봉(하곡)
강무(수암)
하항(송강)
박열(임이재)
정인함(금월헌)
하혼(모헌)
권제(원당)
이승(청휘당)
이현우(토천)
조수천(정와)
최여계(매헌)
배형원(정곡)
강숙
유덕용(초료당)
조이천(봉곡)
이종욱(화헌)
조식(매암)
조의민(경모재)
조차석
조차마(모정이욱(팔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