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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124)

예곡 곽율 (禮谷 郭𧺝, 1531년 ~ 1593년)

by 석암 조헌섭. 2012. 12. 21.

예곡 곽율 (禮谷 郭𧺝, 1531년 ~ 1593년)
  
곽율(1531∼1593)의 자는 태정(泰靜)이고, 호는 예곡(禮谷)이며, 본관은 현풍(玄風)으로

솔례(率禮)에 거주하였다.

그는 1531년 현풍(玄風) 솔례(率禮)에서 아버지 참봉공 지인(之仁)과

어머니 창녕(昌寧) 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문집은 {예곡집(禮谷集)}이 있다.

 

청년시절에는 김해의 산해정으로 남명선생을 찾아가서 제자의 예를 올리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경전(經傳)을 읽을 때는 글의 내용을 조금도

놓치지 않고 공부하여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15∼16세 때에는 종숙(從叔)인 연일당 곽지운이 여러 사람들에게 

'곽율은 장래가 촉망된다'고 칭찬하면서 {소학}을 가르치니 책에 있는 것을

그대로 본받아 효도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실천하였다고 한다.

28세 때(1558년) 가을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나 분수(分數)의 경중(輕重)을 알고

영리(營利)에 뜻을 두지 아니하였다. 

 

29세 때(1559년) 당시 남명선생의 문인인 정구(鄭逑), 김우옹(金宇翁), 배신(裵紳),

김부륜(金富倫), 박성(朴惺), 곽준 등과 도의로 교유하였다.

그 해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42세 때(1572년) 겨울에 성균관의 천거로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 從6品)에 취임하였고,

43세 때(1573년) 봄에 어버이를 모시기 가까운 김천도찰방(金泉道察訪)으로

    전임(轉任)되었다.

 

찰방은 역의 교통 통신과 관련한 업무와 말을 관리하며 관내 백성들에 대한

대민 업무도 수행하는 직책이다. 찰방으로 있으면서 지역 백성들의 세금 중에서

명분이 없는 세는 절반으로 줄이고, 한 조각의 물건도 사사로이 취하지 않았으며,

거두어들인 쌀이나 베 등을 절약하여 저축해 두었다가 공공의 일에 사용하기도 하여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55세 때(1585년) 학행으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에 특진되었고,

56세 때(1586년) 홍산현감(鴻山縣監)으로 임지에 내려가 민심과 문풍을 쇄신하였으며,

61세 때(1591년, 신묘) 예천군수(醴泉郡守)를 지냈다. 

 

62세 때(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예천군수직에서 물러나 덕유산 아래

   갈천동(葛川洞)에 있었는데, 당시 초유사 학봉 김성일이 사람됨을 알아보고

   초계가수(草溪假守)로 임명하였다. 


당시 합천, 초계, 거창, 삼가, 고령 등지에서 전 장령 정인홍, 전 좌랑 김면,

전 군수 곽율,  전 현감 박성(朴惺), 유생 곽준(郭 ), 하혼, 조응인(曺應仁),

문경호(文景虎), 권양(權瀁),  박이장(朴而章), 문홍도(文弘道) 등이 창의(倡義)하였다. 

 

초계가수로 부임한 곽율은 당시 초계 의병장인 전치원, 이대기 등과 더불어 낙동강에서

배로 침입하는 왜적을 수 차례에 걸쳐 토벌하였으며, 특히 의병군에게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일에 많은 공을 세웠다. 


곽율이 초계가수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자, 도내 유생 정유명(鄭惟明) 등이 상소하기를,

초계는 낙동강 변의 요충지로서 적의 왕래에는 여기를 거쳐야 하는데

감히 오지 못하는 이유는 곽율이 마음을 다하여 방비한 때문입니다.

 

따라서 정식으로 임명하여 그 공을 세우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라고 하였다. 얼마 후 예곡은 초계군수로 정식 임명되니 가수로 있은 지 3개월 만이었다.

63세 때(1593년, 계사) 정식 초계군수로 임명된 곽율은 의병 지원과 백성들을 보살피다가

난중에 너무 과로하여 초계의 관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별사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