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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어우동(於于同).

by 석암 조헌섭. 2024.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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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동(於宇同)   

본명은 박어우동(朴於宇同)
아버지는 승문원 지사 박윤창(朴允昌) 어머니는 정귀덕(鄭貴德). 
오빠 박성근(朴成根)이었다.
조선시대 당시 금기에 가까운 간통 사건을 일으켰기에 가문에서 파문되어 
성을 뺀 어우동(於宇同)이란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곱게 자란 뒤 왕손인 종실 태강수(泰康守) 이강과 
혼인(婚姻)하였으나 태강수 이강은 아내를 좋아하지 않았다.
타고난 미색은 있었으나 시집간 지 얼마 안 되어 방사(房事)에 미흡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강은 이혼할 속셈으로 아내 어우동이 집에 온 은장이와 
바람이 났다고 모함했는데 조사 결과 무고로 밝혀져서 어우동과 재결합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이를 실행(房事)치 않고 오히려 어우동을 내쫓았다. 

황당하게 소박(疏薄)을 맞고 홀몸이 된 어우동은 그때부터 결심(決心)하였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남자를 사귀라고 옆에서 꼬드긴 여종도 있었다. 
어우동은 남편에게 복수(復讐)하는 길은 많은 사람들과 정분을 나누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수산수, 방산수를 비롯한 왕족(王)들, 과거 급제자 홍찬 등 양반들 
그 외에 양인과 노비(奴婢)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애정 행각을 벌였다.  
그러다 보니 몸은 더욱 뜨거워지고 남자 없이 못 자는 음녀(淫女)가 되었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어우동과 간통(姦通)을 한 촌부가 치졸하게 간통 사실을 
승정원에 신고하였다. 그로 인해 옆에서 꼬드긴 여종과 함께 교수형을 당했다. 
그러나 어우동은 간통죄가 아니라 강상죄(綱常罪)로 처형되었다.  

강상죄는 패륜이나 노비가 주인을 살해한 경우 처벌받는 엄청나게 무거운 중벌이었다.
양반집안 출신의 여성이 양인(良人)을 비롯한 천민과 노비(奴婢) 10여 명과 정을 통한 
희대(回臺)의 간통 사건이라 사회의 파문(波紋)이 컸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 그녀가 남긴 시와 작품은 파괴(破壞)되거나 불태워졌으며 
유감동(兪甘同) , 황진이(黃眞伊), 허난설헌(許蘭雪軒), 이구지(李仇之)
대방군 부인(帶方府夫人)
송씨 등과 함께 오랜 시간 동안 부도(婦道)를 어긴 
여성으로 매도(罵倒)당해 지탄(指彈)을 받았다.  

또한 장녹수(張綠水), 문정왕후(文定王后), 장희빈(張禧嬪) 등과 함께 조선의 악녀로
비판(批判)받아 왔지만,
마침내 1910년에 대한제국(大韓帝國)이 망하고 나서야 
그들의 명예(名譽)가 회복(回復)되었다.


여루시인 박어우동(朴於宇同) 대표작 '부여회고(扶餘懷古)라는 시를 남겼는데

白馬臺空經幾歲--백마대 빈지 몇 해가 지났는고

落花巖立過多時--낙화암 선 지도 참으로 오래겠지~

靑山若不曾緘黙--청산이 만약 침묵하지 않는다면

千古興亡問可知--천고의 흥망을 물어 알 수 있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