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이야기(128)

곽재우와 의병의 날

by 석암 조헌섭. 2024. 6. 5.
728x90
반응형
“ 곽재우와 의병의 날 ” 

지난 이명박 정부는 6월 1일을 의병의 날로 지정(指定)하였다.
 1592년 음력으로 4월 14일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난 날이다.
망우당 곽재우(
忘憂堂 再祐)가 의병을 일으킨 날은 1주일 뒤쯤인 음력 4월 22일이다.
정부가 정한 날짜는 의병(義兵)을 일으킨 그날을 양력(陽力)으로 환산한 것이다.
십여 명의 집안 젊은이부터 규합(糾合)하여 시작되었다.

6월은 현충일도 있고 6.25도 있다. 그런즉 6월은 호국보훈(護國報勳)의 달이다.
 공교롭게도 이달은 제22대 국회의원 개원한 달이다. 나름대로 지역을 위해 팔을 걷어
 부치겠다고 나선 의원들을 보면서 의병의 날 선포(宣布)와 그 역사적 의미를 새겨 본다.

 
의병(義兵)은 문자 그대로 의병이다. 의기로 일어난 민병(民兵)임으로 관군이 아니다.
 그러면 관군(官軍)이 있는데 왜 의병이 일어났을까? 의문(疑問)도 생긴다.
 왜구는 조선 침략 20일 만에 한양까지 도달할 만큼 삽시간에 조선이 장악(掌握)된다. 

 기록(記祿)에 의하면 왜군 행렬에 무수한 칼들이 반사(反射)하는 빛이 햇빛보다 더
눈부셨고 왜군(倭軍)
깃발이 들판을 메웠다고 한다.
당시 조선 백성( 朝鮮 百姓)들이 얼마나 두려웠을까! 짐작된다. 

 
준비(準備) 없이 뒷통수를 얻어맞은 관군은 무력했고
병사들도 도주하여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밀렸다.   
생각하면 국가의 커다란 국난(國難)은 예나 지금이나 국록(國祿)을 먹는 공직자들의
직무유기(職務遺棄)와 직무태만(職務怠慢)의 결과이다.

당시 조정 신하들은 당파싸움에 골몰(汨沒)했고 임금은 간신배(奸臣輩)에 둘러
싸여있어 이를 간파(看破)한 일본이 조선 강탈의 적기로 보고 기를 높이 올린 것이다.
 

주색잡기(酒色雜技)만 하다 놀란 선조는 백성을 버리고 명나라까지 도망을 치려 했다.

 충신들 권유로 겨우 의주에서 멈췄지만, 백성을 두고 피난(避難)을 가는 왕의
뒤통수에 조선
백성들의 분노(憤怒)와 비애(悲哀)가 교차 한다.

흔히 우리는 임진왜란 하면 이순신 장군을 떠 올린다. 그러나 충무공(忠武公)은
수군(水軍)이지
육군(陸軍)이 아니다.

당시 육지의 관군은 줄곧 수성에 실패(失敗)했고 왜적과 싸워 이긴 장수조차
없었다.

왜군을 격파한 장군은 오직 조선에서 곽재우 의병장(義兵將)뿐인 것이다. 
 " 나라가 위급할 땐 목숨을 바친다! "는 견위수명(見危授命)을 걸고 의병들을 모집,
스스로
붉은 주단으로 옷을 지어 입어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 불렸다.

처음에는 10여 명의 집안 젊은이부터 규합(糾合)하여 시작되었다.
10여 명으로 출발한 초기 의병들은 그의 통솔력으로 수천명으로 늘었고 그들을
바탕으로
게릴라 유격전술(遊擊戰術)을 펼치며 무패로 왜군을 무찔렀던 것이다.

당시 육지에서 조선의 첫
승리였던 정암진 전투에서는 왜군이 2천 여명이나 죽였다.

 그는 조총의 사거리와 구조도 잘 알아 왜군이 집중사격(集中射擊)을 퍼부어도
유유히 백마를 타고
나타나 간담(肝膽)을 서늘하게 하였으며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고
소문이 돌아  "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 "
으로 불렀다.

이후 왜군을 무찌른 공을 인정받아 조정에서 관직(官職)을 받았으나 이내
사직하였고
그 뒤에도 일생 동안 수십차례 높은 관직이 하사(下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사양(仕樣)한 의인 중 의인(義人)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그런 위대한 선열들이 있었기에 수많은 외침을 물리치고 존재한다.
그러면 그런 의병 정신은 어디서 나오는가? 혹자는 한민족(韓民族)이 국가에 대해
주인의식(主人意識)이
있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민족적 한(恨)에서 나온다고도 한다. 

 그러나 의병정신의 원천은 우리의 충효 사상(忠孝 思想이다. 
조선은 유교를 숭상(崇尙)했고 그 결과
부모와 군주를 하늘처럼 섬기는 문화를 가졌다.
그런 정신문화(精神文化)는 적이 침입했을 때
목숨 걸고 싸우는 것이 부모를 지키는
일이자 군주(君州)를 지키는 일이었다. 

 따라서 스스로 일어난 의병들은 죽음을 불사하고도 국가에 어떠한 책임(責任)이나
보상(補償)조차
묻지 않았다.

 그러면 오늘도 그런 정신(精神)이 있을까?  분명 21세기 세계화 속에서도 유교의
전통과
충효사상(忠孝思想 )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때와 비교하여 애국심(愛國心)의 강도나 농도에서는 극히 의문이다.
 더구나 조그만 국토도 반으로 나뉘었고 그 반쪽도 이념(理念)으로 나뉘어
으르렁대고 있기
때문이다.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再祐) 선생이 지금 우리의 현실을 본다면 무엇이라 할 것인가?

 생각해 본다.
국난(國難)에 스스로 일어나 대업을 이루고도 벼슬을 마다한 선열(先烈)이 있는가 하면,
벼슬을 쟁취(爭取)해 보려는 정객들이 넘치는 우리의 정치 현실은 매우 대조적이다. 

 
곽재우 장군은 의령 출신으로 황해도 관찰사(觀察使) 곽월(郭越) 의 아들이다.
남명 조식(南冥曺植)의 외손서 이며 대사헌 동강 김우옹(東岡 金宇顒)과는 동서 사이다. 

홍의장군(紅衣將軍)은 기강 나루 적선을 40여 척을 빼앗았고 왜놈의 조총을 활과 칼로 
대적하여 적을 모두 섬멸(殲滅)하여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는 곽재우란 명성이나 
10명의 부하에게 똑같은 붉은 옷을 입혀 백마를 타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왜놈을 교란해 왜놈 장수는 300명 이하는 곽재우와 대적(對敵)을 못 하게 하였고,

야간 전투(戰鬪)에는 나뭇가지 여러 가지에 횃불을 써 군사가 많이 보이게 하여 
임란을 승리로 이끈 전술 그해 6월 1일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에 기록되어 
매년 6월 1일을 의병의 날(곽재우의 날)로 지정, 대동놀이 한마당 잔치로
의령 둔치의 큰 줄 당기기는 기네스북에 등재(登載)된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 되었다.

위대한 선열(先烈), 곽재우 의병장은 오래전에 떠났지만
오늘날까지 그의 장도는 맑은 빛을 발하고 있다.
빛나는 그 검(劍)을 보며 오늘날 우리에게 진정한 애국(愛國)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 홍의장군 장도 / 보물 제671-1호) 전장 86cm 너비 3Cm 자루 16m 

   호국보훈(護國報勳)의 달
                       
                                     석암 조헌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