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이야기

“황진이(黃眞伊 1506년?~1567년?) ”

by 석암 조헌섭. 2024. 6. 4.
728x90
반응형


 “
황진이(黃眞伊 1506년?~1567년?) ”


황진이는 중종 때 개성 황진사(黃進士)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고도 하고, 
맹인의 딸이었다고도 전하는데, 생부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는다. 
황진이가 기생이 된 동기는 15세경에 이웃 총각이 혼자 황진이를 연모하다 
병으로 죽자 서둘러서 기계(妓界)에 투신하였다고 한다.
 
황진이(黃眞伊)는 조선 중기의 시인, 기녀, 작가, 서예가, 음악가, 무희이다. 
이름은 진랑(眞娘)이고 기생 이름은 명월(明月)이었다.  
용모가 출중하며 뛰어난 총명과 민감한 예술적 재능을 갖추어 그에 대한 
일화가 많이 전하고 있다.
 
당대의 석학 서경덕(徐敬德)을 유혹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 사제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사숙(私淑)하여 거문고와 주효(酒肴)를 가지고 그의 정사를 자주 방문하여 
당시(唐詩)를 정공(精工)하였다고 한다. 

황진이는 자존심도 강하여 당시 10년 동안 수도에 정진하여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천마산 지족암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하여 파계시키기도 하였다. 
호기로 이름을 떨치던 벽계수라는 왕족의 콧대를 꺾어놓기도 하였다. 
 
박연폭포(朴淵瀑布), 서경덕, 황진이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하였다고 한다.
시와 그림, 춤 외에도  학문적 지식과 성리학과 사서육경에도 해박하여 
사대부, 은사들과 어울렸다. 

많은 선비와 이런저런 인연과 관계를 맺으면서 전국을 유람 하였고 
그 가운데 많은 시와 그림을 작품으로 남겼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인해 대부분 실전(失傳)되었고 
남은 작품들도 그가 음란함의 대명사로 몰리면서 저평가되고 
제대로 보존되지 않아 대부분 멸실되었다. 

그는 뛰어난 재주와 함께 출중한 용모로 더욱 유명하였다. 
신분 특성상 황진이라는 이름이 정사(正史)에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야사(野史)룰 통해 그에 대한 내용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대표작으로 《만월대 회고시》, 《박연폭포시》,《봉별소양곡시(奉別蘇陽谷詩)》 
《영초월시(?初月詩)》等 수많은 작품과 시조를 남겼다. 
지금도 풍월을 좋아하는 사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황진이 
사내라면 한번쯤 품고 싶은 희대의 절세미인이었다.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우동(於于同).  (273) 2024.06.21
곽재우와 의병의 날  (222) 2024.06.05
“ 장희빈(張禧嬪1659년~1701년) ”  (3) 2024.06.04
“장녹수(張綠水)”  (2) 2024.06.04
최영경(崔永慶) 선생  (286) 2024.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