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이야기

사 육 신[死六臣]

by 석암 조헌섭. 2025. 2. 22.
728x90
            육신(四六臣)
 
          매죽헌 성 삼 문(梅竹軒 成三問) (1418-1456년)


성삼문(成三問)
  조선 세종 때의 문신으로 사육신의 한사람
집현전 학사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성삼문’ 세조가 단종을 쫓아내고
왕에
오르자 국새를 안고 통곡했다.

불에 달군 쇠로 다리를 뚫고 팔을
잘라내는
고초를 격다가 죽었다.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매죽헌(梅竹軒) 자는 근보(謹甫), 이다.
충청남도 홍성(洪城) 출신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개성유후(開城留后)를 지
성석용(成石瑢) 할아버지는 판중부사(判中府事)를 지낸 성달생(成達生) 
아버지는 도총관(都摠管)을 역임한 성승(成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435년(세종17)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43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예조참의, 동부승지 우 좌부승지 등을 역임했다.
그 후 왕명으로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예기대문언두(禮記大文諺讀)를
편찬하고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취금헌  박팽년(醉琴軒 朴彭年)
(1417-1456년)



박팽년[朴彭年]
  사육신의 한사람 황보인, 김종서 등과 함께
문종과 단종을 보필하여 단종 복위에 힘썼다.

박팽년[朴彭年]은 모진 고문[拷問]을 받다가 숨을 거두었다.

세조는 숨을 거둔 시신의 사지마저
찢게 했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아버지와

 형 등 일곱 명이 처형[處刑]됐다.

문무[文武]를 겸비한 김문기[金文起]는 단종 복위와 관련, 군대를 동원하는 임무[任務]를 맡았다. 그 또한 사지[四肢]가 찢겨
죽었다. 

박팽년은 세종 1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集賢殿] 학사가 되어
 사육신[死六臣] 등과 함께 한글 편찬[編纂] 사업에 참가하였다.
문종 재위 2년 만에 병고로 서거하자 고명을 받아 어린 단종을 돕다가 충청도

관찰사[觀察使]로 나갔다.

외직에 있는 동안 수양대군은 황보인, 김종서, 안평대군을 죽이고 왕권을
찬탈한 사건인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났고 그 후 형조참판으로 제수되어
 내직으로 돌아온 박팽년은 사육신 등과 함께 단종 복위 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함께 모의했던 간생이 김질이 장인 정창손[鄭昌孫]에게 밀고하여
세상에 밝혀져 단종 복위가 실패로 돌아가 모두가 체포되어 투옥되는데,
사실을 부인 하기만 하면 살려줄 것이라 하였건만 끝내 이를 거절하였다.

단계 하위지(丹溪 河韋地1387-1456)

단계 하위지(丹溪 河韋地)
  단계 하위지(丹溪 河韋地)는

문종 때는 수양대군과 함께 여러

 공을 세우기도 했다.


단종 복위와 관련해 결국

수양대군에게 사지를 찢겨 죽는

 형벌을 받았다.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집현전 부수찬으로 임명되었다. 
1444년 집현전 부교리로서 오례의주(五禮儀註)의 상정에 참여했다. 

1446년 동복 현감으로 재직하던 형 강지가 탐간 죄로 투옥되자, 
관직을 사임하고 전라도로 내려가 형을 보살폈다. 

1448년 집현전 교리로 복직했고, 이듬해 춘추 관사관으로 
고려사 개찬에 참여했다.
1456년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유성원·
김문기(金文起) 유응부 등과 함께 비밀리에 단종 복위를 추진하여 
명의 사신을 위해 베푸는 연회에서 세조와 측근 관료들을 제거하기로 했다. 

그러나 계획에 차질이 생겨 거사가 연기되자 모의에 참여했던 김질(金礩)이 
세조에게 이 사실을 알려 복위 운동이 탄로 나고 주모자로 체포되었다. 
국문을 받으면서도 당당한 기개를 굽히지 않다가 거열형을 당했다.

남효온(南孝溫)은 〈추강집 秋江集〉에서 그의 인품에 대해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했으며, 말이 적어 하는 말은 버릴 것이 없었다. 
공손하고 예절이 밝아 대궐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다, 

1691년(숙종 17) 신원 되었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노량진 민절서원, 선산 월암서원, 홍주 노운서원, 
연산 충곡서원, 의성 충렬사 등에 제향 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백옥헌 이개(白玉軒 李塏 ?-1456년)
 
 이개(李塏, 1417~1456) : 본관은 한산, 자는 청보(淸甫)·백고(伯高)이고,
호는 백옥헌(白鈺軒),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1758년(영조 24)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의 노운서원(魯雲書院) 등에 제향 되었다. 

이개 ?-1456년 한산이씨 이색의 종손 1447년 세종27년 중시에 합격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렀으며 시문이 청절하여 세상에 이름을 높았다.
1456년(세조2년) 성삼문 박팽년과 함께 단종 복위를 논의하다가 발각되어
모진
고문 끝에 피살, 그때 읊은 시는 충절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본래 세조와도 친교가 있어 전상의 진술을 강요받았으나 끝내 대답하지
않았으며
숙부 이계전이 세조에게 내왕함을 항상 경계했다.
혹독한 형벌을 받는 동안 안색조차 변함이 없어 보는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했다.
1758년(영조34년)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시호를 충간이라 고 하였다.


한산이씨 이개(李塏)의 묘 

                           유 성 원(柳誠源) (?-1456년)
 
유성원(柳誠源, 미상~1456) : 본관은 문화, 자는 태초(太初)이고, 
호는 낭간(琅玕)이며 시호는 충경(忠竟)이다. 1691년(숙종 17)에 와서 
사육신의 관작을 추복시켰고,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유성원 단종 복위의 계획이 발각되자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술잔을 나누고
조상의 사당 앞에서 의관을 갖추고 자결했다   




유 응 부 (劉應孚)  ?-1456 년

유응부(兪應孚, 미상~1456년) : 본관은 기계, 호는 벽량(碧梁), 
자는 신지(伸之)·선장(善長)이며,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무신으로 관직에 나아갔고, 
첨지 중추원사 평안도 절제사를 지냈다.


    유응부 교지


유응부 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