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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32)

나라수퍼 치사사건 17년 만의 반전

by 석암 조헌섭. 2016. 2. 5.

나라수퍼 치사사건 17년 만의 반전

 

무고한 ‘3인조 강도’ 만든 공권력…진범 자백도 묵살했다

입력 2016-02-05 02:31:47
수정 2016-02-05 09:3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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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수퍼 사건의 진범이라고 고백한 이모(오른쪽)씨가 지난달 29일 ‘삼례 3인조’

최모·임모·강모(왼쪽부터)씨에게 사죄의 술을 따르고 있다. [사진 한겨레]

경찰과 검찰 등 공권력은 무고한 시민들을 살인자로 만들었다.

 

이들은 “진짜 범인은 따로 있다”는 제보를 무시했고, “우리가 범인”이라는 진범들의

 고백도 묵살했다.하지만 최근 진범이 억울한 옥살이를 당한 피해자들을 찾아가

 “제가 살인자입니다”고 고백·사죄하면서 17년 만에 대반전이 일어났다.

 1999년 전북 완주군 삼례읍에서 발생한 ‘나라수퍼 3인조 강도치사 사건’이다.


지난달 29일 이모(48·경남)씨는 그동안 범인으로 몰려 억울한 옥살이를 해온

 임모(37)씨 등 ‘삼례 3인조’를 찾아가 “저를 포함한 ‘부산 3인조’가 삼례 나라수퍼

 사건의 진짜 범인”이라고 자백했다.
이씨는 “친구 조모(49)·배모(48·지난해 사망)씨와 함께 익산에 가서 놀던 중 돈이

 떨어져 인근 삼례의 수퍼를 침입해 강도 짓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이씨는 범인으로

 몰려 옥살이를 한 최모씨 등 3명을 만나 무릎 꿇고 사죄했다.

 

 이 사건의 공소 시효는 2009년(10년)에 만료돼 법적 책임을 물을 근거는 사라졌다.
사건은 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설을 앞둔 그해 2월 6일 오전 4시쯤 삼례읍

 나라수퍼에 3인조 강도가 침입했다. 이들은 수퍼를 운영하던 유모씨 부부의 입과

 눈을 청색 테이프로 봉하고 금반지·목걸이 등 200만원어치를 훔쳤다.


또 안방으로 건너가 집주인 유모(당시 77) 할머니의 손과 발을 묶고 입·코에 테이프를

 붙인 뒤 책상 서랍에서 25만원을 꺼내 달아났다. 유 할머니는 기도가 막혀 30분 뒤

 질식사했다.
경찰은 사건 발생 8일 만에 임모(당시 20)·최모(19세)·강모(19)씨 등 ‘삼례 3인조’를

 붙잡아 강도치사 혐의로 구속했다. 이들은 동네 선후배 사이로 가정 환경이 불우해

 중학교만 졸업한 뒤 동네에 남아 있던 청년들이었다.


수퍼 주인은 당시 “범인은 경상도 말투를 쓰는 20대”라고 진술했지만 이들은 삼례

 인근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현지 토박이였다.
그런데도 경찰은 “비슷한 범행 전과가 있는 주변의 불량 20대를 집중적으로

조사한 결과 이들 3명이 범행을 자백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1~3심 재판을

 거쳐 4~6년씩 옥살이를 했다.


사건 발생 두 달 뒤인 99년 4월 완주경찰서에 “삼례 나라수퍼 강도 사건의 진범을 안다”는

 제보전화가 걸려 왔다. 부산 3인조와 알고 지내던 한 친구가 “이씨 등 3명이

 나라수퍼에서 할머니를 살해했고 반지·목걸이 등을 금은방에 팔았다”고 제보했다.
하지만 경찰은 현상금(300만원)을 노린 정신이상자의 제보라며 무시했다.

 검찰도 진실을 덮었다.

 

 99년 11월 부산지검은 “ 범인이 따로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내사에 착수했다.

 부산 3인조가 필로폰 투약 혐의로 조사를 받던 중 나온 정보였다.
검찰은 이들의 범행을 자백받고, 장물업자의 장부에서 강탈 품목도 확인했다.

 사건은 2개월 뒤 전주지검으로 이송됐다. 하지만 초기 사건을 담당했던 전주지검

 최모 검사는 ‘혐의 없음’으로 종결했다.


이 사건은 발생 8개월 만인 99년 10월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이 나면서 진실이 영원히

 묻히는 듯했다. 이에 따라 최씨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2000년 6월 전주지법에 재심을

 청구했으나 2002년 대법원에서 기각됐다. 지난해 3월 다시 재심을 청구해 전주지법이

 오는 3~5월 재심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살인자의 누명을 쓴 삼례 3인조의 삶은 망가졌다. 최씨는 “전과가 있다는 이유로

 살인범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청춘을 썩혔다. 경찰에서 구타와 협박을 당해 거짓

 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또 “이씨가 스스로 찾아와 진실을 밝혀 주니 울분이 풀리지만 무고한 시민을 살인자로

 몰았던 공권력의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부산 3인조 중 범인이라고 자백한 이씨는 “경찰·검찰에 ‘우리가 범행을 저질렀다’고

 했는데도 들어 주지 않았고, 오히려 ‘다 끝난 사건인데 뭘 그러느냐’ ‘더 이상 떠들지

 말고 조용하게 살라’는 으름장을 들었다”고 말했다. ‘부산 3인조’ 중 조모씨는 현재

 익산에서 자영업을 하고 있으며, 배모씨는 지난해 사망했다.
전주·부산=장대석·차상은 기자 dsjang@joongang.co.kr

당시 수사 검사, 지금은 대형 법무법인서 일해

전북 삼례의 세 청년이 17년간 ‘살해범’ 누명을 쓴 일은 검경의 합작품이었다.
사건 발생 두 달 후인 1999년 4월 전북 완주경찰서에 걸려온 진범 제보 전화를

 ‘정신이상자의 헛소리’로 여긴 B형사는 여전히 전북 지역에서 경찰로 일하고 있다.

 B형사는 4일 본지와의 통화에서 “증거에 따라 수사했고, 최선을 다한 수사였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7개월 뒤인 99년 11월 부산지검은 진범 ‘부산 3인조’를 체포했다.

그중 한 명이었던 이모(48)씨는 그때 자백을 했다. 당시 부산지검 강력부 수사관이었던

 C씨는 4일 “이씨의 진술과 전주지검의 사건기록, 법원 판결문을 비교해 보니 모두 일치했다.

 이에 따라 담당 최모 검사도 내사를 시작했다”고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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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부산지검에서 사건을 맡았던 최 검사는 한 지방검찰청의 검사장이 됐고,

 수사관 C씨는 법무사로 일하고 있다.최 검사장은 전화 통화에서

 “특별히 언급할 내용이 없다”고 말했다.

 

C씨는 “최 검사는 열정적으로 수사했지만 관할이 바뀌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억울한 옥살이를 한 3명이 재심에서 무죄를 받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진실 찾기는 전주지검이 이 사건을 ‘혐의 없음’으로 종결하면서 막혔다.

자백한 이씨가 진술을 번복했다는 것이 처분의 주요 이유였다.


▶관련기사 무고한 ‘3인조 강도’ 만든 공권력…진범 자백도 묵살했다
‘삼례 3인조’의 재심 신청을 맡은 박준영 변호사에 따르면 이씨는

“당시 전주지검에서도 자백했지만 검찰의 추궁이 이어지지 않았고 소환됐다가 조사도

 안 받고 구치소로 돌아가는 일이 반복됐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공범의 지인이

 ‘범행을 부인하는 게 어떻겠냐’고 해 따랐다”고 털어놓았다고 한다.


당시 전주지검에서 수사를 맡았던 또 다른 최모 검사는 이 사건 1년여 뒤 검찰을 떠나

 한 대형 법무법인에서 일하고 있다. 본지는 그에게 수차례 전화를 걸고 문자메시지를

 남겨놓았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사건 발생 당시 전주지검장은 이종찬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었다. 그는 진범인

 ‘부산 3인조’가 체포됐을 때는 부산지검장이었다. 현재는 한 법무법인의 대표로 있다.

 박 변호사는 “지금이라도 수사를 맡았던 경찰관과 검사, 오판했던 판사가 사죄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장혁 기자, 부산=차상은 기자 im.janghyu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