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이야기(463)

지천태통[地天泰通]

by 석암 조헌섭. 2021. 4. 25.

지천태통[地天泰通]


지천태통[地天泰通]은 역경 지천태[地天泰]의 괘를 말한다.
주역의 열한 번째 괘로 ‘건’괘가 아래에 ‘곤’ 괘가 위에 있어 천지의 기운이
교합하는 만사가 형통[亨通] 할 수 있는 가장 ‘길’한 괘이다.

그러나 ‘권력과 부가 어디까지 지속되겠는가?
불십년 화무십일홍 [權不十年 花無十日紅]이란 속담이 있듯이 권력을 잡았다고 해서
멋대로 행세하거나 세도[勢道]에 빌붙었다고 해서
함부로 날뛰다가 세상이 바뀌어
냉엄한 심판을 받게 되면 역사의 오명[汚明]을 남
기게 마련이다.

보라! 을사늑약 때의 친일 오적[親日五賊]이나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과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국정원장의 신세가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된 것이야 말로
역사[歷史]의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음으로 ’주역‘은 ”태평“의 때가 오면 역[易]은 바뀌기 때문에
다음은 지는 때, 어려운 시기를 대비 [對比]하라고 말하고 있다.
경제력과 건강[健康]을 챙기고 인맥[人脈] 관리[管理]를 잘해야 한다.
잘 나갈 때는 옛 친구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으나 어려움이 닥치면 호시절의
친구는 다 떠나고 결국 옛 친구만 남는다.

그러나 자기 분수도 모르고 직언[直言]을 하면 호랑이가 사람을 물어 흉하다.
가끔 윗사람에게 “속 시원하게 할 말 다해버렸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매우 위험한 행동이다. 삼가야 한다. 감정이 들어간 통쾌한 직언은 ‘폭언이나 시위에
불과하다.

직언을 할 때는 자신이 지금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는 생각으로 잘못하면 물려 죽는다는
각오와 용기[勇氣]가 필요하다.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정성 [精誠]을 다해야 진정성과
순수함을 인정받아 크게 성공할 수 있다.

잘나갈 때 욕심을 버려야 한다. 모든 어려움은 ‘과욕’에서 시작된다. 혼자 잘 살겠다고
주머니 졸라매고 베풀지 않으면 나중에 큰 어려움을 당한다.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유지하는 데는 많은 노력과 기교가 필요함을 잊지말아야 한다.

비탈지지 않은 평지가 없고, 돌아오지 않는 떠남은 없다. 인생은 돌고 도는 것, 걱정이
없는 사람 같아 보여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십자가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남의 인생과 비교[比較]하는 인생이 제일 어리석은 삶이다. 완벽하게 행복한 인생은 없다.
다만 본인[本人]이 만들어 가는 것일 뿐!

막힘의 기운이 있을 때는 새벽이 가장 춥고, 기다림의 끝이 가장 지겹겠지만,
어려울 때 더 분발[奮發]하고, 좋을수록 겸손[謙遜]해야 된다. 인생은 순간이고 찰라 이다.
어느새 거울을 바라보니 순식간에 백발이다. 이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태평도, 막힘도 순간이라오.

주역[周易] 지천태[地天泰]의 괘는 곤[坤]三三이 위에 있고 건[乾]三이 아래에 있다.
자연의 이치대로 하면 하늘 건[乾]三이 위에 있고 땅 곤[坤]三三이 아래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땅이 위에 있고 하늘이 아래에 있어서 지천[地天]이 태통[泰通]하여 아주
길[吉]하다는 것이다.
서대문에 서재필[]이 주동[主動]이 되어 세운 독립문[獨立門]이 있다.

독립문 위쪽에 있는 태극기는 지금의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태극기[太極旗]와는
괘의 위치가 다튼것이 있다.
하늘[乾]三이 밑에가 있고 땅곤[坤]三三이 위에 있다.

이것이 지천태통[地天泰通]의 괘를 그리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태극기는 하늘 건[乾]三과 땅 곤[坤]三三을
반대로 놓아야 길하다는 지천태통[地天泰通]의 괘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태극기처럼 하늘건[乾]三 위에 있고 땅곤[坤]三三이 밑에 있으면
지천부새[地天否塞] 괘가 되어 길[吉]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역경[易經]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주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의 태극기는 8괘[卦]에서 나온 것이지 64괘에서 다른 것이 아니다.
어떤 옛날 태극기에는 8괘를 다 그린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 때문이다.
그르므로 태극기의 64괘의 괘사[卦辭]를 통용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하늘 건[乾]三 위에 있고 땅 곤[坤]三三이 밑에 있다는것은 여러가지 상징적인 뜻이 있다.
사람의 몸은 땅흙으로 되었다. 사람의 몸에 하느님의 성령이 와서 우리의 얼이 되었다는
것은 하늘이 땅 아래 온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하느님의 거룩한 얼이 어찌하여 이 죄악[罪惡]의 덩어리인 몸둥이 속에 갇혔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몸은 가짜 생명의 탈을 쓴 것이다.
이 몸을 버리고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영생[永生]이다.

하나님의 성령[聖靈]이 몸속에 들어와 사람의 얼 생명이 된 것이 법[法]이요.
령[靈]이요. 덕[德]이며 도[道]이다. 예수, 석가, 공자, 노자는 영원한 생명을 참 나로
깨달은 군자들은 이 세상에서 귀족적인 신분을 버리고 민중 속으로 내려왔다.
그것도 민중의 맨 아래인 거지의 자리까지 내려온 것이다.

예수는 두 벌 옷이 없었고, 잠잘 때 머리둘 곳이 없었다.
아내도 없었고 동전 한닢도 없었다.
석가는 임금의 자리를 버렸고 가정을 버렸다.
손수 밥을 빌어 먹었고옷을 기워 입었다.

톨스토이는 러시아 농민복인 루바시카를 입고 농민이 되었다.
쟁기질을 하고 마차를[馬車]를 몰았다. 김을 매고 거름을 쳤다.
마하트마 간디는 농장을 만들어 농사를 지었다.
사람들이 마주 서기조차 꺼리는 불가족 천민인 하리잔들과 같이 웃옷을 벗고
맨발로 다녔다. 하리잔의 자녀를 양자로 삼았다.

이것은 하늘이 땅 아래서 온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이것은 지천태통[地天泰通]으로 아주 길[吉]한 것이다.

2021년 4월 일
석암 조 헌 섭

'나의 이야기(463)'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력의 성과  (0) 2021.05.15
퇴계선생의 활인심방(李退溪 活人心方)  (0) 2021.05.02
간번지쟁[簡繁之爭]  (0) 2021.04.04
나비부인[割給休書]  (0) 2021.03.27
용알뜨기[撈龍卵]  (0) 2021.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