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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124)

최영경(崔永慶) 선생

by 석암 조헌섭. 2024. 4. 15.

 

최영경(崔永慶)
 
 최영경(崔永慶, 1529∼1590)의 자는 효원(孝元)이고, 호는 수우당(守愚堂)이며,
본관은 화순(和順)으로 진주(晋州)에 거주하였다.
 그는 1529년(중종24년) 7월 16일에 한양(漢陽)의 원동리(院洞里)에서 아버지
세준(世俊)과 어머니는 평해(平海) 손씨(孫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에 관한 자료는 [수우당실기(守愚堂實紀)]가 있다.

 32세 때(1561년, 신유) 오건(吳健), 이조(李晁), 김우옹, 하항(河沆),
유종지(柳宗智) 등과 서로 강마하였고([桐谷實紀]),

 

33세 때 이로(李魯)가 아우 보(普)·지(旨)와 함께 문하에서 글을 읽었으며(松巖集),

35세 때(1564년, 갑자)에 남명선생의 명성을 듣고 서울로부터 동생 여경과
함께 선생을 찾아  뵙고 제자가 되었다.

 

36세 때(1565년, 을축)에는 덕산의 뇌룡사(雷龍舍)로 선생에게 공부하러 온
이광우(李光友)와 만났다. 

이때 최영경이 비로소 문하에서 배움을 청하였고,

겨울에는 정구(鄭構)와 구사재에서 주서(朱書)를 토론하였다([竹閣集]).


38세 때(1567년, 정묘) 이대기와 더불어 덕산의 산천재로 가서 선생께 배웠다.
    이때 김우옹도 함께 공부하였다. 
40세 때(1569년, 기사) 봄에는 이정(李瀞)이 남명선생을 뵈러 왔는데,
    이때에 최영경, 김우옹 등과 더불어 [심경] 공부하였다.

43세 때(1572년, 임신) 남명선생이 덕산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부고를 서울에서 듣고 바로 달려와 제를 드리고 심상(心喪)을
3년 동안 하였다. 이 때 설학 이대기가 와서 위로하였다.

 

44세 때(1573년, 선조 6년, 계유) 조정에서 학행으로 이른바
'오현사(五賢士)'의 한 사람으로 발탁되면서부터였다.

이때 이조(吏曹)에서 추천이 있었는데, 화담 선생의 제자 가운데 이지함,
남명 선생의 제자 최영경과 정인홍, 퇴계(退溪) 선생의 제자  조목(趙穆),
일제(一齊) 선생의 제자 가운데 김천일(金千鎰)이 발탁되었다.

 

47세 때(1576년, 병자) 하항(河沆), 하응도(河應圖), 구변 등과
더불어 덕천서원을 창건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여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8월에 이정(李瀞), 이조(李晁), 이로(李魯), 이천경(李天慶), 하응도(河應圖),
손천우(孫天祐), 최영경(崔永慶), 이광우(李光友), 하항(河沆), 유종지(柳宗智),
성여신(成汝信) 등이 덕천서원의 건립을 의논하기도 하였다.

이때 서원 앞 시냇가에 소나무 100여 그루를 심었는데,
시내 가까이 있는 한 그루는 최영경이 손수 심었으므로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수우송(守愚松)이라고 한다.


48세 때(1577년, 정축) 독자였던 홍렴(弘濂)이 요절하여 양주(楊州)에 있는
선친 좌랑공(佐郞公)의 묘 아래에 빈소를 차렸는데, 이 때에 정여립이 이발을
따라와서 조문하였으나, 그는 정여립의 사람됨을 바로 보지 않았다.


52세 때(1581년, 신사)에는 조정에서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으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상소를 올려 이르기를,

"이제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않은 때를 당하여 공론이 행해지지 않고 붕당이
왕성하여 기강이 날로 쇠하니 실로 국가 존망의 갈림길에 처해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명덕(明德)으로 밝히고 위엄으로 다스려 붕당을 짓는 무리들로
하여금 그 흉계를 펴지 못하게 하소서."

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로부터 당쟁은 더욱 거세져 나라는 어지러워지고 급기야 간특배들이 득세하여
어진 선비들이 모함으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55세 때(1584년, 갑신)에는 유성룡(柳成龍)이 영남을 시찰하면서 최영경을
만나러 만죽산에 오기도 하였다([西厓年譜]).


57세 때(1585년)는 {소학}, {사서} 언해교정청(諺解校正廳)의 낭청(郞廳)으로
소명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58세 때(1587년, 정해)에는 함안군수로 있던 정구(鄭逑)가 방문하여 [주례]를
    강론하였다.

    이 때 하수일(河受一), 이대기, 김창일, 신가 등이 최영경에게서
    학문을 배웠다([雪壑先生文集]; [濯溪集]).
    학문은 능히 스스로를 삼가고 근면하여 독서를 매우 좋아하였다.

겨우 약관의 나이에 여러 번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대과(大科)
회시(會試)에는 실패하였다.
그로부터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자기 수양을 으뜸으로 하는 공부에 정진하였다.


 60세 때(1589년)에 이대기(李大期)가 그를 모시고 하혼(河渾)의
집으로 가서 김면(金沔), 박성(朴惺), 조응인(曺應仁), 문위(文緯), 박정번(朴廷) 등과 담화를 나누기도 하였는데, 10월에 정여립(鄭汝立)의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길삼봉(吉三峯)이라는 누명을 쓰고 이 사건에 연루되어 옥에 갇히는 몸이 되자

평소 그를 미워하던 정철(鄭澈)과 성혼(成渾)이 위관으로 있으면서 심한 매질을
가하여 끝내 옥중에서 죽게 하였다. 죽음에 임박하여 옆에 있던 사람이 남길 말을
청하자 일어나  바를 정(正)자를 쓰다가 획수를 다쓰지 못하고 임종하였다.
그는 정여립(鄭汝立)과 평생에 단 한 차례밖에 만나지 않았다.


그 후 1594년에 김우옹과 그 친구들의 끈질긴 상소로 죄가 없음이 밝혀져
대사헌(大司憲)에 추증되고, 특별히 선조가 예관을 보내 제문을 내려 충절을
기렸다.

 

향사 : 그는 남명선생을 위하여 덕산에 서원을 건립하는 등 남명선생에 대한
추모사업에 진력하여 뒤에 덕천서원에 배향되었으며,
현재는 진주의 도강서당과 옥종의 수정당에서 향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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