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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124)

“래암 정인홍(來庵 鄭仁弘)”

by 석암 조헌섭. 2024. 1. 12.
“래암 정인홍(來庵 鄭仁弘)”


내암 정인홍(來庵 鄭仁弘 )선생 일대기  

내암 정인홍(來庵 鄭仁弘 )은 조선 중종 때 합천 야로현 남사촌에서
증 영의정(贈 領議政) 윤(倫)의 아들로
태어나 광해군 때의 문신으로
대북의 영수이며 자는 덕원 호는 내암으로 가야
출신이다. 
 
 '정내암연구논총(鄭來庵硏究論叢)'의 '내암연보(來庵年譜)', 서산(瑞山)
 대동보(大同譜) 등 문중 기록은 가정(嘉靖) 병신생(丙申生.中宗 31년: 1536년)으로
 되어 있으나 객관적 공식자료에 따르면 1535년생이라고 밝히고 있다.
 즉 문중 기록은 1536년으로 되어 있고,
 '내암집해제'를 비롯한 자료들에는 1535년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내암 사후 그에 대한 기록들이 온전할 리 없었으므로 생기는 일일 것이다.
  내암의 자는 덕원(德遠)이요, 본관은 서산(瑞山)으로 고조 성검(成儉) 대에 와서
 처음으로 합천에 이거(移居)하였다.
 
6세 때 이미 문장을 지었으며, 어려서 참새를 가지고 놀다가 새가 죽자, 글을
   지어 조상하기를「새가 죽었는데 사람이 이를 곡한다는 것은 의(義)에 어긋 나지만
   네가 나 때문에 죽었기에 나는 너를 곡하노라」 하였다.
   이른바 조추문(弔雛文)이다.
 
10세 때는 해인사에 들어가 글을 읽었다.
20세를 전후해서 삼가 토동(兎洞)의 뇌룡사(雷龍舍)에서 남명을 뵙고 제자의 예를
    갖추었다.
1558년 생원시에 합격을 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26세 때 조정은 문정왕후의 죽음으로 혼란의 시대의 막이 내려지고 있었고,
   남명 조식의 죽마고우 이준경이 영의정에 올랐다.
   조정에서는 조광조를 신원하고 23년간 유배되었던 노수신을 불러들이는 등 변화의

   나타났고 조야에서는 이준경에 대한 기대가 컸다. 이준경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조선조 500년을 통틀어 초기에는 황희, 중기에는 이준경, 후기에는 채제공이라 하여

  조선 3대 정승을 꼽을 정도로 그는 학덕이 출중한 인물이다.

28세 때 한강(寒岡)과 도산(陶山)으로 가서 퇴계 선생을 뵈었다. 퇴계의 제자들과 
   함께 강의를 들으면서 내암은 계속 질문을 하였고 한 번 질문하면 끝까지 따져
   물어 퇴계를 곤경에 처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다른 제자들이 보기 민망할 정도로 퇴계가 쩔쩔 맬 때도 있었다. 내암은 날카로운
   눈빛에 논리정연한 언변을 갖추었고, 그 나이로서는 이르기 힘든 폭넓은 학식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 서너 달 지난 뒤, 내암이 제자가 되고자 청하였다.
 
   이때 퇴계는 "어려서부터 몸에 병이 많았고, 중년에는 벼슬하느라 다니다 보니,
   공부를 하지 못하여 학문이 보잘것없으니
   남의 스승 노릇하기에 부족한 사람이오"라고 하며 간곡히 사절하였다.
   내암은 거듭 제자가 되기를 간청했지만 퇴계는 끝내 사절하였다. 그래서 내암은
   몹시 서운한 마음을 품고 돌아왔다고 한다.
 
31세 때 김해 산해정으로 남명선생을 찾아갔는데, 이때 선생이
  '대학팔조가(大學八條歌)'를 지어 주며 학문에 더욱 정진하도록 당부하였다.
   남명은 내암의 자질이 비범함을 알아, 만년에 차고 다니던 칼을 주면서 경계를
   삼도록 하였는데 내암은 늘 꿇어앉아 칼을 턱밑에 대고 정신 가다듬기를
   죽을 때까지 하였다.
 
   내암의 학식은 옛것을 상고함이 넓고 깊어서 스승을 능가하고 특히 잘잘못을
   따지는 글에 능숙하여 사람들은 그의 잘못을 알아도 그 강함을 두려워하여 감히
   항거하지 못했다.
   율곡 이이(李珥)는 이런 내암을 마음속으로 좋아하고 선망한 나머지 서로
   친하게 지냈다. 
   
   또한, 실록에 이르기를 "정인홍은 잘못을 탄핵함에 지위 고하를 가리지 않고,
   나라의 법령을 엄히 지켜 한때나마 나라의 기강이 자못 숙연했다" 하니 성품의
   강인함을 짐작할 수 있다.
 
37세 떼 1572년 조식과 이준경이 세상을 하직한다.
   이준경은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로 노수신을 키워 놓고 죽었는데,
   노수신은 개혁파의 선봉장이 되기까지 참으로 뼈아픈 세월을 거쳐야 했다.

   조선의 지성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지만, 역사에서 온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던

   인물 중의 한 사람이 노수신이다.
   인종의 스승이기도 했던 노수신의 벼슬살이는 평탄하지 못했다.

   노수신을 중심으로 이산해, 정언신등이 함께 일으킨 개혁의 바람은 의외로 강했다. 
   전라도의 진보적 지식인 정여립, 이발 등과 조식의 제자 최영경,

   정인홍, 김우옹 등을 후원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정여립을 가장 총애했다.

1578년 뛰어난 행실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육품직에 제수받았다.
   이때 동문(同門)인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도 함께 선발되었다.
   6품직을 제수받고 곧 황간(黃澗) 현감으로 나갔다. 이어 사헌부 지평(持平),
   영천(永川)군수 등을 거쳐

45세 때 사헌부 장령(掌令)을 제수받았다.

   이때 약포(藥圃) 정탁(鄭琢)이 대사헌, 율곡 이이가 대사간으로 있었다.
   내암이 가세하여 그야말로 산림(山林) 출신들이 나라의 기강을 세우는
   관직에 포진하게 된 것이다.
 
   내암이 장령으로 상경하자 평소 그의 명망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그의 풍채를
   보려고 모여들었다고 한다. 내암은 장령으로서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즉 나라의 법령을 지키고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비리를
   저지르면 탄핵을 하고 또한 아전들의 부정과 모리배의 농간, 수령의 비리를
   적발하여 백성의 고통을 덜어 주었다.
 
   당시 동서로 당론이 갈라진 조정에는 내암의 이러한 활약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내암은 벼슬에 회의를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582년에 어머니 진양 강씨(晉陽 姜氏) 상을 당하였고,
 
51세 때는 익산군수를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상소를 올려 왕에게 학문에
   힘쓸 것과 정치적 폐단을 혁신할 것을 주장하였다.
 
54세 때 기축옥사가 일어났다. 전주에 사는 동인(東人) 정여립(鄭汝立)이 모반을
   꾀했다는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철(鄭澈), 성혼(成渾)이 중심이 된
   서인(西人)들은 사건을 확대, 과장하여 평소 자신들이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무고한 수많은 동인들을 연루시키게 된다.

   이때 동문수학하고 출사(出仕)도
같이 한 수우당 최영경이 옥사에 연루되자
   내암은 곧 "기축옥사에서 소인이 군자를
역모 반역으로 몰아 죽였다"고 하며
   수우당의 신원을 위해 힘을 썼다.

 
   또한 이를 계기로 내암은 당시 조정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던 서인들의 미움을
   사게 되어 산림에서 은거 생활을 하게 된다.  
   내암이 기축옥사 후 조정에서 물러나 산림에서 생을 보내고 있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때 내암은 곧 김면(金沔)과 함께 적을 막을 계책을 논의하러 거창에 있던 순찰사
   김수를 찾아갔다. 김수를 만난 내암은 "지금 적에게 짓밟히게 된 것은 성이
   튼튼하지 않거나 군사가 용감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변방의 장수, 수령 등이 스스로 궤멸하여 도망한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대는 한 도의 원수이니 마땅히 힘을 다해 적을 막을 방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라고 김수에게 적을 막을 방책을 강구해야 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하지만 김수는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이에 내암은 다시 돌아와 김면에게
   이르기를 "우리들은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 있는데 이런 대란을 만나 적
   때문에 길이 막혀 임금께서 있는 곳에 나아가 죽지 못한다면, 창의하여 전쟁터
   에서 죽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어찌 일반 백성들처럼 도망하여 국가가 망하는 것을 보고 구차히 살길을
   찾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적을 무찌를 것을 결의하였다.
   드디어 5월 10일 김면과 함께 합천 숭산동(崇山洞)에 모여 뜻을 같이 하는
   선비들을 규합하여 창의하였다. 내암선생가장(來庵先生家狀)의 기록이다.
 
  6월 초순경에는 의병을 모집하였다. 곽율, 박성, 권양 등과 문인인 하혼(河渾),
  조응인(曺應仁), 문경호(文景虎), 박이장(朴而章) 등이 중심이 되어 각 군에서
  의병을 모아 각각 주둔을 하였다. 내암은 합천군 가장(假將)인 전첨사(前僉使)
  손인갑(孫仁甲)을 중위장(中衛將)으로 삼아 방어의 계책을 세웠다.

  6월 22일에는
김면과 같이 군사를 이끌고 거창에 모여 초유사 김성일과 함께
  적을 무찌를 방책을
논의하였다.
  이때 내암은 의령의 곽재우, 거창의 김면, 초계의 전치원, 이대기 등과

  고령, 성주의 의병들 사이를 왕래하면서 위급한 곳을 지원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내암이 임란 때 의병장으로서 올린 전공은 무계(茂溪) 전투, 초계(草溪) 전투,
  안언역(安彦驛) 전투, 성주성(星州城) 전투, 진주 성지원 전투 등을 들 수 있다.
  무계는 현풍과 성주 사이에 위치한 수륙의 요충지였다.
  즉 적의 중요한 보급로였다. 내암이 거느린 의병들은 고령, 성주 의병들과
  합세하여 6월 6일 새벽 무계의 적을 기습하였다.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6월 23일에는 초계에서 적 보급선 12척을
  공격하였다. 이때 의병장 손인갑이 말을 타고 강중에 뛰어들어 적선을 추격하다가
  진흙에 얽혀 말과 함께 익사하였다. 8월과 9월에 성주성을 탈환하기 위해 공격을
  하였으나 성을 회복시키지는 못했다.
 
  10월 진주성 1차 전투 때 적에게 포위된 진주성을 구하러 오기도 하였다. 내암은
   이러한 전공으로 진주 목사, 제용감정(濟用監正), 성주가목(星州假牧) 등의
   벼슬을 제수받았다.
 
58세 때(1593) 9월에는 당시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청으로 영남의병대장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장문의 상소를 올려 나라가 전쟁에
휘말려 혼란을 겪어야
   했던 원인을 분석하고 앞으로 전쟁을 극복하고 전후 국가를
 재건하는 방법을 말하였다.
   이듬해 상주목사, 영해부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이어 형조참의, 부승지 등에 제수되었으나 다 나아가지 않았다.

67세 때 사헌부
대사헌으로 제수되자 상경하였다가 병을 핑계로 세 번 사직소를 내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이후로 내암은 조정에서 실질적으로 관직 생활을 하지는 않았다.
 
69세 때 남명 조식선생의 문집을 간행하였다. 이때 쓴 발문에 퇴계 이황을 논란한
   것이 문제가 되어 성균관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팔도의 향교에 통문을 돌려
   내암을 규탄하였다. 이 일로 인해 내암은 퇴계 제자들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73세 때 1608년 당시 영의정 유영경이 영창대군을 옹립하여 정권을 계속 유지하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상소를 올렸는데, 이 일로 인해 영변으로 귀향을 가게 되었다.
   유배 도중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곧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한성판윤, 대사헌, 찬성 등의 벼슬을 내렸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출사하지 않았다.
 
75세 때 1610년(광해군 2년) 9월 오현(五賢)의 문묘종사(文廟從祀)가 있었다.
   종래 문묘에 모셔 오던 선현들 외에 새로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을 문묘에 모시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때 내암은 왕이 그의 문병을 위해 내의와 예관을 보내 상경할 것을 당부하자,
   사직소를 올리면서 이언적 이황의 문묘종사가 부당하다고 말하였다.
   즉 퇴계가 남명과 성운(成運)을 평한 말을 빌어, 이황의 출처(出處)가 분명치
   못함을 비판하였다.
 
   이 일로 인해 조정과 사림에서는 큰 논란이 일어났다. 퇴계 제자가 중심이 된
   성균관 유생들은 권당(捲堂 :현재의 동맹휴학과 같음)에 들어갔으며 성균관의
   청금록(靑衿錄)에서 이름이 삭제되기도 하였다. 청금록은 성균관에 비치된
   유생들의 명부(名簿)이다.
 
79세 때 1614년(광해6) 좌의정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해 조정에서는 강화도에 유배되어있던 영창대군을 죽이려 하였는데 내암은
   영창대군이 어려서 역모에 가담할 수 없었다고 하면서 신원소를 올렸다.
 
82세 때 1617년 나이에 영의정으로 제수되었다. 하지만 고향에 있으면서 사직소를
  올리고 그 자리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83세 때 1618년 인목대비의 서궁유폐가 이루어지고 이어 폐모논의가 일어났다.
   이때 내암은 영의정으로서 의정부에 글을 보내 반대의사를 밝혔다.
   그리고는 이해 3월 영의정을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고 그 후로 죽을 때까지 도성
   출입은 물론 상소도 올리지 않았다. 이후 사람들은 내암을
   산림정승(山林政丞)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88세 때 1623년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폐모론을 주도했다는 죄명으로 합천서 서울로
   압송된지 5일만에 처형을 당했으니 이때 나이 88세였다.
   죽기전 내암은 폐모론을 주장한 적이 없다고 강변을 하였으나 모두 허사였다.
   사직은 했지만 명목상 영의정이었다.


   정인홍 묘소

 또한, 간신 이이첨이 직권을 도용하여 광해조 어지러운 정치를 부채질하였기
   때문에 내암 역시 이를 벗어날 수 없었다.
   내암 사후 280여년이 지난 1908년(순종 2년) 역적의 죄명이 벗겨지고 관직이 다시
   회복되었다.
   지금 내암의 후손들은 선대의 잘못 알려진 역사를 바로 잡으려고 무척이나 애를
   쓰고 있다. 아울러 합천임란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내암의 의병활동을 재조명
   힘을 기울이고 있기도 하다. 
                                         청람사 부음정(원장 김수근)


합천군 청람사 부음정(원장 김수근)은 2008년 4월 22일 오전 10시 심의조
군수(초헌관), 유도재 군의회의장, 변항종 경찰서장, 박춘효 교육장, 김성곤

 소방서장, 김영수 유림회장 및 래암 정인홍 선생선양 회원 등 300명이 참석
한 가운데 조선 성리학 영남학파의 거두였으며,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도를 대표한

 의병장이었던 래암 정인홍 선생 추모제를 가졌다 .




청람사 부음정 내부

정인홍의 시대에 이르러 지식인 사회는 크게 세 부류로 분화되고 있는데...
조정에 몸을 두고 봉건 체제와 신분제 강화를 꾀하는 이기론자 있었고
벼슬에 나가되 출처를 중시하며 정치적 개혁을 주도하고자 한 이준경, 노수신등이
있고 재야에 처하면서 정치적 개혁 세력을 길러 내고자 했던 조식, 성운등이 있었다.

당시 왜구의 노략질뿐 아니라 문정왕후와 윤씨들의 폭정 속에 민생은 날이 갈수록
피폐해졌고, 참다못해 일어난 임꺽정의 난 등 민중의 소요로 사회는
더욱 불안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때 올린 조식의 상소로 명종은 경악했고, 조정은 발칵 뒤집힌다.
부정부패와 불의와는 추호도 타협하지 못하는 조식의 성품과 기질은 훗날
정인홍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해인사 가기 전에 합천군 가야면 황산리가 있다 황산리 동네가 거의
끝나가는 쯤, 오른쪽에 다소 평범해 보이는 사당과 재실같은 기와 건물이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조선시대 중엽의 뛰어난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來庵
鄭仁弘선생을 모신 청람사 부음정이라는 곳이다. 멀리 매화산(梅花山)이 보인다.

내암 정인홍은 1535(중종 30년)-1623(인조 1년)조선 광해군 때의 문신으로

 대북의 영수이며 자는 덕원 호는 내암으로 가야 출신이다.
 1573년(선조6) 학행으로 황간현감에 발탁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합천에서 의병을 모아 왜군을 물리쳐 영남의 병장의
 호를 받았다.

1602년 대사헌에 승진하고 그 후 공조참판, 좌참찬, 우의정 등을 지냈으며 인조반정
으로 참형되고 가산이 적몰당하였으나 순종 2년(1908)에 죄명이 탕척되고 복작되었다.
내암 정인홍 선생관계 고문서 82점과 내암선생 문집외 10종류 16권이 있다

그러면   내암 정인홍 선생(來庵 鄭仁弘 先生)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아래에 내암 정인홍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글 한 편을 옮겨 왔다.

 퇴계와 율곡 그리고 남명, 공교롭게도 이들 문하에는 뜨거운 감자가 하나씩 있다.

퇴계 문하의 학봉 김성일, 율곡 문하의 우암 송시열,
 그리고 남명 문하의 내암 정인홍 학봉 김성일(1538~1593).
서애 류성룡과 함께 퇴계의 제자로, 학봉은 고절한 인품과 진주성 싸움을 김시민
 목사와 함께 승리로 이끈 후 진중에서 외로이 최후를 마쳤음에도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온 후 복명을 잘못한 것 하나로 만고의 역적처럼 일반인들에게 각인되어 있다.
 
우암 송시열(1607~1689).
조선왕조실록에 3천여 회나 등장한다는 우암, 그 하나만으로도 상징성이 높은
 인물이다. 17세기 이후 조선정신사를 주도한 우암, 우뚝하게 솟은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유감스럽게도 치열한 당쟁의 화신으로 각인되어 있다.
 
내암 정인홍(1535~1623).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암만큼 우리 역사에서 비극적 인물이 있을까?
앞서 이야기한 학봉은 후에 이조판서로 추증됨으로써 공식적으로는 그의 과오를

 넘어선 공적을 인정받았으며, 우암은 그를 배향한 서원이 무려 70여 개나 될
정도로 사후에 많은 문도들의 추앙을 받았다.

그러나 내암은 인조반정(1623)에 당하여 율에도 없는 참형을 당하고 가산이 적몰
당하였으며 오랫동안 신원되지도 못하였다가 1908년에야 신원되었다.
율에 의하면 80세가 넘은 사람이나 재상을 지낸 사람은 참형시킬 수가 없다고
 하는데 내암은 당시 89세였으며 그 직이 영의정이었다.

내암의 몰락과 더불어 스승 남명의 정신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던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남명의 소외는 이렇게 남명의 수제자였던 내암 정인홍의 생애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내암이 그 정도로 지탄받을 만한 인물인가?
내암 정인홍(1535~1623)은 한국 유학사와 정치사에 있어서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산림 출신으로 드물게 영의정의 자리에까지 오른 정치가였으나 끝내

 역적으로 몰려 죽었다.

그의 정치적 행동이 어떠했기에 역적이라는 이름을 뒤집어썼던가?
내암에 대한 평가는 기록에 따라 거의 극단적이다.

율곡전서에 보면 "정인홍은 맑은 이름으로 세상에 중망을 얻었는데 이 직책이
 내릴 적에 사람들이 모두 그 풍채를 우러러 보았다"라는 글이 있고,
 
 선조실록에도 "정인홍은 비리를 탄핵하는데 있어서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았고
 국법을 엄하게 지켜서 일시에 기강이 자못 숙연하였다"라는 글도 있다.
반면, "강직하나 식견이 밝지 못하니 용병에 비유한다면 돌격장이 적격이다"라는
글도 있다. 

그가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할 때의 죄상기에는 "역적 괴수 정인홍은

 뱀과 같은 성품과 도깨비같은 마음을 가지고 처음에는 비록 이름은 사림(士林)
사이에 도둑질하였으나 한낱 지방에서 세력이나 쓰는 품관일 뿐이었다"라고 쓰여
 있기도 하다.

이렇게 양극단의 평가가 교차하는 경우가 있을까?
그야말로 역사의 뜨거운 감자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왜 지금 하필 이 뜨겁디 뜨거운 감자를 직접 손으로 만져야 한다는

 말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의 위대한 정신 남명의 정신을 오늘 복원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검토하고 넘어가야 할 관문이기 때문이다.
아, 내암을 모르고서야 어찌 남명을 오늘에 되살릴 수가 있을까?
내암은 남명과 같은 합천 출신으로서 남명이 향리인 합천 삼가에서 뇌룡정,
 계부당을 짓고 많은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칠 때, 그 때 사제의 연을 맺은
것으로 보인다.
 
1572년 남명은 죽기 직전에 방울과 칼을 각기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런
내용이 전한다.
"조식은 항상 방울을 차고 다니면서 그 소리를 듣고 정신을 일깨우고, 칼을 지니고
 있으면서 혼미를 깨우쳤다.

 말년에 방울을 김우옹(성균관대 설립자 심산 김창숙의 13대 조부)에게 주고
 칼을 정인홍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으로 마음을 전한다'고 하였다.
 정인홍은 칼을 지니고 있으면서 고개를 숙이고 꿇어앉기를 죽을 때까지 하루와 같이
 하였다."

이렇듯 남명의 사랑을 특별히 받았을 뿐만 아니라 남명의 정신을 직통으로
이어받은 사람이 바로 내암 정인홍 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일단 내암의 생애와 사상을 개략적으로 살펴 보고자 한다.

내암 정인홍은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합천에서 김면과 의병을 일으켜
 성주에 쳐들어온 왜군을 크게 물리쳤고 10월에는 '영남의병대장'의 호를 받았다.
 다음해 의병을 모아 성주, 합천, 함안 등지를 방어하고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02년에 대사헌, 1618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유교대사전 참조).
그는 현실 문제를 깊이 인식하고 외교 국방책을 논했으며 실학적인 보민(保民)의
 위민사상에 투철하였다고 한다.
 
 주자 성리학의 도학적인 면을 넘어서 실학적인 경세가로서의 면모도 내암은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암의 경세가적 측면과 관련 역사문제연구소
이이화 소장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여기에서 상공업과 농업문제를 연결시키고 생민을 위해 이용후생의 방법을
 찾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그의 상소와 차자의 내용에 상당히 많이 담겨 있다.
 광산 채굴, 운송 수단의 개발, 상업의 장려, 시장의 확대 등 정책 제시는
16세기의 시대 사정에 비추어 볼 적에 커다란 경제 정책의 진화을 의미하며 후기
 실학파의 현실 개혁과 상통한다고 하겠다."

<이이화,"조선후기의 정치사상과 사회변동".(한길사,1994),109쪽
남명학연구논총 제2집(1992)에도 수록됨>

이러한 내암의 정신은 광해군의 정책 방향에도 반영이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내암을 비롯 남명 문도들이 중심이 된 대북파는 먼저 전쟁 중에 피폐된 산업을
 복구하고 부강한 국가를 재건하기 위하여 토지조사사업과 호적조사사업을
실시하고
 공납제를 대동법으로 바꾸어 처음으로 경기도에서 시행하였으며
성지와
무기를 수리하여 군사훈련을 강화하였다.
 
 (한영우, 다시 찾는 우리역사,322쪽 참조). 그리고 세자의 몸으로 임진왜란
이라는 미증유의 국제전쟁을 치러내고 왕이 된 뒤에는 전후복구사업을 위하여
 15년간 분골쇄신한 광해군, 이러한 광해군과 대북파의 역할에 대해 역사는
 뒤늦게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광해군의 몰락과 함께 내암의 비극적 운명도 같이 하게 된다.
죽음자체야 비정상적인 정권교체기에 의당 있게 마련인 역사적 희생이라고
 위로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그 정신마저도 함께 매몰되어버렸다는데 내암의
비극이 있는 것이다.

또한, 내암이 그렇게 존중해마지않던 스승 남명의 정신도 역사의 변방으로
 밀려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 정도로 내암은 용서받지 못할 자, 역사의 죄인이라는 말인가?

생각컨대 반정에 성공한 서인정권이 열거하고 있는 내암에 대한 죄상은 거의
근거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인조반정의 대의명분이 된 소위 폐모살제(廢母殺弟)의 패륜, 그 윤리적
폐정에 대해서 내암이 책임이 있다는 서인정권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내암의 문집인 "내암집" 권10~11의 글에는 광해군 때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하는데 반대하고 있으며 유교의 윤리강상을 강조하고 있음이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영창대군에 대해서는 "8세의 어린이는 이해에 따르고 버리는 소재를 알지
못합니다.
 그가 역모에 참여하지 않음은 무릇 혈기 있는 자 누가 그 사실을 모르겠습니까"
라고 하고 있으며 인목대비의 폐모에 대해서는 "군신 자모의 명의는 하늘에서
나온 것이어서 바꾸지 못합니다"라고 분명 반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내암이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과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에 대해서 그 주장을
 달리하고 있는 것을 검토해 보면 내암이 결코 열정만을 앞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대의에 입각한 매우 논리적인 사람이란 걸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사리에 맞는 일관된 주장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즉 임해군은 친형이긴 하나 역모를 하였다는 혐의가 분명하므로 처벌해야 하는
것이고, 영창대군은 사실 왕권의 불안 요소이기는 하지만 결코 죄를 짓지
 않았으므로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글을 본다.
 
"또 들으니 그 할은론을 먼저 낸자는 그 옛날 전은의 설을 주장한 자에게서 먼저
 나왔다고 합니다. 이것은 어찌 무도한 임해군에게는 두터우면서 어찌 죄를
 저지르지 않은 영창대군에게는 야박합니까"
이러한 모습으로 미루어 볼 땐 내암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원칙에 입각한 냉철한
 법률가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결국 광해군 재위기간에 일어난 모든 불의한 일에 대해 내암이 책임을 뒤집어
쓰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갔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것도 89세의 나이에 참형으로...
이 점에 대해 거의 울분을 토로하듯 하고 있는 학자가 있다.

대진대학 권인호 교수의 주저 <조선중기 사림파의 사회정치사상(한길사)>에 보면
그의 논의 진행 방식은 가히 전투적이라 할만 하다. 다음은 그의 글이다.
"사림파 중에서 당색이 비교적 진보적 색채를 가진 일파는 동인-북인-대북으로
 이어지는 경향의 사림들이다.

그들은 지방의 신진 사류였고 대개 영남에서 강우학파로 조식의 제자들,
 즉 정인홍을 비롯한 동문과 그 제자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선조연간의 말기에 일시적으로 그리고 광해군 때 정권을 잡았으나
 인조반정으로 철저히 숙청당하여 조선이 끝날 때까지 정계에 재등장하지
 못하고 폄하되어 왔다.

그렇게 되다보니 그들의 모든 사상과 정치적 행동들이 악인들로 날조 왜곡되어 왔다.
그것은 바로 인조반정이 가지는 쿠데타와 반역적 성격을 호도하고 서인들의
 정치적 행위를 적반하장으로 정당화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권인호,조선중기 사림파의 사회정치사상,(한길사,1995),191~192쪽>
권인호 교수의 열정적인 글을 읽다보면 지금까지 퇴율이 함께해온 밥상에 남명의
수저가 놓여있지 않다고 밥상을 들어 엎지나 않을까 하고 슬며시 걱정이 들
 정도이다.
 
지난 날 찌그질대로 찌그러지고 소외될대로 소외된 남명(그리고 내암), 그 순수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는데 권인호 교수와 같은 열정적인 논객이 많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노파심에서 한마디 한다면 일단은 밥상에 남명의 수저를 놓는 것이
 순서이고 그 다음 그 밥상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 밥상 그것은 조선의 정신이요 우리의 정신인 것이다. 우리 정신이라는 숲의
 모습과 함께 거목 남명의 의의를 우리는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어쨌든 내암은 당시 시사나 시정에 대해 의견을 내놓긴 했으나 직함만 지니고
 향리에 묻혀 있었던 점에도 비추어 본다면 서인정권이 열거한 그의 죄목은
사실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오히려 그는 정적들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생각컨대 내암이 철저히 몰락한 그 비극의 원천에 대해서 오히려 우리는 다른데서
 찾아야 한다. 그것은 내암에게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점이기도 하며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케하기도 한다.
 
내암에게는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는가?
역사문제연구소 이이화 소장의 다음과 같은 글을 통해 그 일단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는 많은 정적 또는 반대 세력을 만들어냈다.

성혼을 탄핵하여 그 제자 이귀의 반감을 샀고, 이황을 비난하여 영좌사림

(퇴계학파)에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유영경을 규탄하여 소북파의 적이
되었던 것이다.

특히 그는 토호와 수령의 횡포를 남김없이 지적한 탓으로 이들의 두려운 존재가
 되었고 장령으로 있으면서 언론이 준열하여 벼슬아치들의 경원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것은 그의 준열하고 강직한 성품 탓이기도 했으나 위민위국을 위한

개혁의지에 열화같은 정열을 보인 탓이었던 것이다."

<이이화,"조선후기의 정치사상과 사회변동".(한길사,1994),122쪽 -남명학연구논총
 제2집(1992)에도 수록됨>

강경한 지조, 강려(剛戾)한 성품, 엄정히 경의(敬義)를 내세우는 행동, 시비에
 대한 준열함...오오 어찌보면 혼탁한 우리 시대, 원칙과 정도는 사라지고
불의(不義)만이 넘실대는 타락한 이 소돔의 시대에 정말 아쉬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내암의 이러한 퍼스낼리티가 또한 화를 초래하고 말았다고 우리는 볼 수

 있다는 게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강한 것은 부러진다.
지나치게 맑은 물에는 고기가 놀지 않는다.
혼자만 가지 말고 모두 함께 가자.
앞만 보고 달리지 말고 좌우도 살펴야 한다.
뜨거운 정열은 가슴에 행동은 사려깊게.

이러한 세속적 교훈을 떠올리게 한다.
아아, 세상사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로구나.

 
남명학연구원장인 전 고려대 김충렬 교수도 1604년 내암 주도로 이루어진 "
남명집" 편찬(그 부록에 퇴계를 비판한 내용을 담음)과 관련하여 이렇게
 이야기한 바 있다.
 (내암집 해제,19쪽).
"내암의 <남명집설>은 결정적으로 강우(江右, 남명학파), 강좌(江左, 퇴계학파)가
 서로 반목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니 내암은 정계에서 서인과 반목하여 그 반을
 잃었고 학계에서 강좌(퇴계학파)와 반목하여 또 반을 잃은 이를테면 적을 많이
 만들어 스스로 외로워지는 형세가 된 셈이다."
내암 자신은 물론 스승 남명마저 우리 정신사에서 소외되는 결과를 초래한 그
 대표적 사건이 <회퇴변척소>가 아닌가 한다. 이것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회퇴변척소, 즉 내암이 회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의 문묘종사가 부당하다고
논핵한
 글이다.
이로 인해 퇴계의 문도들과 메울 수 없는 갈등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그 내용을 읽어보면 내암은 분명 지나쳤음에 틀림없다.

많은 사람들이 존중하는 위대한 정신에 대해서는 자신의 시각만을 앞세우기 전에

그 정신에 대한 이해와 숙려가 선행되어야 함에도 그는 독단적 시각으로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 저간의 사정을
 알고나면 내암을 꼭 이해못할 부분도 없지 않다.
 
광해군 2년(1610)에 동방오현의 문묘종사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를 비롯 회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이 포함되었다.
그동안 퇴계 문도들은 회재와 퇴계를, 그리고 남명문도들은 남명의 종사를
끊임없이 요구해 왔는데 퇴계문도들의 요구만 관철된 것이다.
결국 남명은 배제된 것이었다. 이 경우 누구라도 열받지 않게 생겼는가.

남명의 인물과 정신이 못하다면 모를까, 더구나 남명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수제자 내암으로서는 스승에 대한 생각으로 이미 평상심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분명 내암은 지나친 바가 있으나 한편 생각해 보면 이 경우 우리는 내암만을

비판할 수 는 없다.

자기 스승이 소중하다면 남의 스승도 존경할 줄 알아야 된다.
이것은 내암에게 해당되는 말이지만 바로 퇴계의 문도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퇴계의 문도들은 남명을 위한 배려를 했어야 했던 것이다.

꼭 동방오현이어야만 했을까? 동방육현이면 어떻고, 칠현이면 어떤가?
 현인은 많으면 많을수록 정신문화가 풍부해지고, 거목은 많으면 많을수록 산천은
 장려해지는 것이 아닌가?
퇴계의 문도들은 내암을 비난하기에 이전에 퇴계의 그 넓은 마음을 닮지 못하는

 자신들의 협량한 마음에 대한 성찰부터 있어야 할 것이다.
 
결국 상처받은 사람은 그들 문도들이라기 보다도 정작 남명과 퇴계 그 두 분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어이없게도 제자들에 의해...
오오, 자기의 깃발만이 옳고 다른 빛깔의 깃발은 용납하지 않았던 사람들,
그러므로 어찌 내암만을 탓할 수 있으랴.

그에게 죄가 있다면 깃발을 너무 일찍 들었다는 것.
그것이 그 자신의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 운명을 초래하고 스승 남명의 정신이

 오늘까지 내내 우리 정신사의 변방에 떠돌게 한 이유의 하나가 되었으리라.
 
훗날 율곡의 깃발을 들었던 자 우암 송시열, 퇴계의 깃발을 들었던 자 갈암 이현일
(소설 "선택"의 정부인 안동장씨의 3남), 우연인지 이 분들의 호가 '암'(庵)자
돌림이다. 논자는 이를 "3암의 비애"라고 부른다. 내암과 우암은 비극적 최후를
 마쳤으며, 갈암은 유배생활의 신산스런 삶을 살았던 분이다.
 
3암의 비애, 그것이 곧 조선의 비애였다고나 할까?
스승을 높인다는 것이 스승을 욕되게 하였고 조선을 욕되게 하였다.
깃발은 나부끼지만 스승의 순수 이념은 퇴색해가는 모습을 우리는 이 '3암'을

 통해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는 그 분들을 거론할 수는
 있을지언정 결코 돌을 던질 수는 없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그 분들을 비판하기에 앞서 그 분들의 생애에서 이해하고

 배워야 할 점이 더 많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오오, 내암 정인홍...
이 시대 이 모양 요 꼴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 시대 사람들 어느 누구도 내암을
 비난할 자격 있는 자 없다.

그를 꾸짖을 수 있는 자. 오직 퇴계와 남명 밖에 그 누가 있으랴.
오히려 우리 시대 단점을 보완한 내암, 우리 시대 재구성된 내암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내암 정인홍이여, 이 더럽고 혼탁한 시대 남명에게서 물려받은
 그 정의(正義)의 칼로 이 시대를 바로 세우라.
일찌기 동년배였던 율곡은 내암을 높이 평가한 적이 있고, 단재 신채호도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고 한다.

"육군에는 을지문덕이고, 해군에는 이순신이며, 정치에는 정인홍이다."
죽으면서 정인홍 평전을 못 쓴 것을 한탄했다고 하는 단재 신채호,
 (논자의 생각으로는 정치보다는 법조 내지 검찰 분야가 적절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단재가 옥중에서 "소설 임꺽정"의 벽초 홍명희에게 보낸 최후 서한에는 이러한
 대목이 있다고 한다.

"이금(而今)에 가장 애석(愛惜)하는 양개(兩個)의 복고(腹藁)
 <대가야천국고(大加耶遷國考)> <정인홍공약전(鄭仁弘公略傳)>이 있으나
이것들은 제와 한가지로 지중(地中)의 물(物)이 되고 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임형택 강영주 편,벽초 홍명희와 임꺽정의 연구자료,(사계절,1996),51쪽>
또한 매천야록을 쓰고 합방의 비운을 참지 못하여 자결한 매천 황현은 19세기
 비바람 몰아치던 조국의 현실을 한탄하면서, 퇴계 문하의 갈암 이현일과 함께
 내암을 아쉬워 하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 바 있다.
 (이이화,앞의 책 92쪽에서 재인용).

"뒷날 유학의 흥륭은 극도로 성했다. 할만 했지만 참재주의 실학은 깡말라서
드디어 온 세상에 일개의 참 도학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가에 무익할 뿐만
 아니라 향리의 모범이 되지도 못하였다.
퇴계 율곡과 같은 현인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정인홍, 이현일과 같은 초년에 명망이

 있는 이를 구하려 해도 얻을 수가 없게 되었다."
 
단재와 매천, 암울한 시대 개혁을 희구하는 사람들은 내암 정인홍의 존재를 못내
 아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 이제 우리 역사의 한 뜨겁디 뜨거운 감자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고자 한다.

아, 내암 정인홍...
내암은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이며, 내암 정인홍이 온갖 비난을 무릅쓰고

 지키고자 했던 스승 남명의 정신을 우리가 오늘 복원해야 한다.
오늘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바로잡는데 남명은 어두운 시대 등대와 같이
 빛나는 정신으로 우리를 인도해 줄 것이리라.
오, 남명의 정신을 외롭게 보존해온 남명학연구원에 축복있을진저...
 
합천선비 내암 정인홍에 대하여
조선조 광해군 때 정계를 주도했던 북인(北人)정권의 정신적 지주였으며,
 인조반정후 인목대비 폐모론을 주장하였다는 죄명으로 죽임을 당한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 하지만 그는 남명의 제자이며 임란때 이 지역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의병장이기도 하다.

인조반정후 이 지역에선 내암에 대해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하였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내암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하려는 학계의 움직임 또한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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