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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일지(121)/산행일지(118)

화왕산(火旺山) 군립공원

by 석암 조헌섭. 2012.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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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왕산(火旺山) 군립공원

관룡사 대웅전

관룡사(觀龍寺 보물제212호)

신라 26대 진평왕 5년(583) 증법국사가 초창(初創)한 신라 8대 종찰(宗刹)의 하나

이며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제자 천 여명을 대리고 화엄경(華嚴經)을 설파(說破)한

도장이다.

대웅전은 원래 석가모니불상을 모셔 놓는 것이 일반적인데, 특이하게 이 관룡사

대웅전엔 약사여래, 석가모니불, 아미타여래 세 부처님을 모시고 있다.

1965년 8월 보수공사 때, 천장 부근에서 발견한 기록에 따르면 이 건물은 조선

태종 1년(1401)에 짓고,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광해군 9년(1617)에 고쳐 세워,

이듬해에 완성했음을 알 수 있다.

앞면과 옆면이 모두 3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장식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건물 안쪽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가운데부분을 한층 높게

한 점이 특이하다.

통나무 구시

지금도 원효대사가 법구경을 설파할 때 모여들었던

그당시 천 여명이 밥을 먹었던 통나무 구시가 관룡사 대웅전(大雄展)에 있다.

약사 기도의 최고의 도량(度量)으로써 1,600년 이란 역사의 전혀 변하지 않고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목조 사찰이다.

 

어느 날 원효대사가 제자 송파와 함께 백일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오색 채운이

영롱한 하늘을 향해서 화왕산 정상의 3개의 용지(龍地)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昇天) 하는 것이 보이므로 절 이름을 관룡사(觀龍寺)라 하고 산 이름을

구룡산(九龍山)이라고 명하였다. 고 관룡사 사적기에 기록되어 있다.

 

옥천 저수지 근처에는 법성사, 구봉사, 청련사, 극락암, 청룡암등 많은 사찰(寺刹)

이 있으며 관룡사 옆 서쪽 용선대(龍船臺(보물 제295호) 석조여래좌상은 1600년

동안 신비한 영험으로 화(禍)를 면한 용선대 부처님의 영험은 대구 갓바위 이상

이라고 세인(世人)들은 말하며 한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고 한다.

 

용선대

용선대(龍船臺)라는 큰 바위 위에 있는 불상(佛像)은 경주 석굴암 본존(本尊)과

같은 양식으로 신라 시대 불상이다.

관룡사 동편 병풍바위 뒤 편에 있는 큰 바위 동굴에는 석간수(石間水)인

약수(藥水)가 있다.

구룡산 정상에서 바라본 옥천 저수지

달집 주위의 군중들

화왕산은 봄에는 진달래가 만발하고 가을엔 갈대축제가매년 열리는 곳이며

정월 대보름엔 56,000평의 억새 단지에 보름달이 떠오르면 국내 유일의 야간 산상

통일기원(統一祈願) 횃불 축제가 열리며 달집을 태우고 억새를 모두 태운다.

 

화왕산성(火旺山城 사적 64호)

가야시대 축성(築城)한 성으로 추정되며 1592년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이

의병을 모아 전공(戰功)을 새운 곳이다.

정상 표지석

창녕조씨 득성비(昌寧曺氏 得姓碑)

 

창녕조씨 득성비(昌寧曺氏 得姓碑)

화왕산 용지(龍池)에는 창녕조씨의 시조(始祖)인 조계룡(曺繼龍)이 잉태(孕胎)한

곳으로 득성비가 새워져 있으며 시조의 유래(由來)를 보면 모친은 창녕 고암촌

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인 이광옥(경주이씨) 의 딸 (예향(禮香) 로 태어나

혼기(婚期)를 앞두고 우연히 청룡질(靑龍疾)을 엳어 백약이 무효이던 중 어느

신승(神僧)의 말에 따라 화왕산 용지에서 목욕기도(沐浴祈祷)를 하면 병이 낫는다고

하여 시키는 데로 목욕 기도를 하고 돌아온 후에 신기하게도 병이 완쾌(完快)되고

태기가 있었으며 어느 날 꿈에 금관옥대(金冠玉帶)를 한 선관(仙官)이 나타나서

이 아이는 동해 용왕(東海 龍王)의 아들이다.

 

이 아들이 자라면 공후(公侯)가 될 것이며 자손이 번영할 것이다.

하고 떠났다.

그 후 십 삭(十朔)이 지나 득남하니 용모(容貌)가 준수(俊秀)하고 겨드랑 밑에

조(曺) 자가 붉게 쓰여져 있었다.

한림학사는 크게 이상하게 여겨 왕에게 알리니 왕도 신기하게 여겨 성은 조(曺)요

이름은 계룡(繼龍)이라 왕께서 이름을 특사(特賜) 하셨으며 그 후 진평왕의

사위로 삼고 창성부원군 태사 벼슬에 봉 하였으며 묘소는 안강읍 노당

2리에 있다.

경주 안강 시조 묘소 덕조회 회원 1989년년6월4일

 

시조 조계룡의 자손으로는 고려에 들어 휘(諱) 겸(謙)은 태조의 따님 덕공공주에

장가들어 태악스승(太樂署丞)을 지냈으며 8대 평장사와 9 소감이 배출(輩出)되었고

 

남명 조식(南冥 曺植)

조선조에 와서는 퇴계 선생(退溪 先生) 과 쌍벽(雙璧)을 이룬 남명 조식(南冥 曺植)

선생은 왕께서 수차 벼슬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성리학의 큰선비로 성리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만 전념하여 문하에 정인홍, 곽재우, 정구, 김우옹, 김 면,등 많은

인재를 배출시켰으며 광해조 에는 특증 영의정이 되었으며

산청의 덕천서원(德川書院), 김해의 신산서원(新山書院),삼가의 용암서원(龍巖書院)

에서 제향을 올리고 있다.

남명조식 선생이 거처한 산천제 재구 덕조회 회원 2001년 4월 22일

죽산 조봉암 선생.....

죽산 조봉암 선생 어록 중에서....

HanKookI

간첩혐의 등으로 구속된 죽산 조봉암 선생이 법정에서 초조하게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죽산은 1959년

2월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돼 같은해7월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나 2011년 1월 재심에서 법원이

무죄를 선고, 반세기만에 명예를 회복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59년 2월 27일 진보당 지도자 조봉암이 피고인 석에 조용히 앉아 판결을 기다리고

있었다. 56년 11월 창당된 진보당 간부들이 간첩과 접선하고 북한의 통일방안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58년 1월 대거 구속됐고 당수 조봉암은 간첩 양명산(본명 양이섭)

으로부터 북한의 지령과 자금을 받았다는 간첩혐의를 받고 있었다.

잠시 후 대법원 주심 김갑수에 의해 판결이 내려졌다.

진보당의 평화통일 주장은 합법이지만 위원장 조봉암은 이중첩자 양명산을 통해

간첩행위를 한 점이 인정된다며 사형이 확정됐다. 변호인단은 재심을 신청했지만

대법원은 그 해 7월 30일 이를 기각한 후 바로 다음날 사형을 집행했다.

구속에서 사형 집행까지 1년 6개월 만에 모든 상황이 종료된 것이다.

1심 재판을 맡은 서울지방법원은 58년 7월 그에게 간첩혐의는 무죄,

국가보안법 위반협의는 유죄로 인정해 징역 5년을 선고했다. 비교적 가벼운 형량의

판결이 나오자 이승만정권의 사주를 받은 반공 청년들이 법원 청사에 난입해 행패를

부리는 사건이 벌어졌고 이어진 항소심은 사뭇 다른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결국 2심에서 간첩죄가 추가돼 사형이 선고됐으며 각계의 애절한 구명 운동에도

불구하고 조봉암이 교수대에서 처형되자 평화적인 통일논의는 중지되고 진보를

표방한 혁신정당의 활동은 크게 위축됐다.

1899년 인천 강화에서 태어난 조봉암은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일제시대에는 공산주의

자로 활동하다가 해방 후에는 중도 통합노선을 걸었다.

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기용돼 이승만을 돕기도 했다.

농민들의 지지가 필요했던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게 조봉암은 농지개혁의 상징성을

띤 필요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후 이념과 가치의 차이로 이승만과 결별한 조봉암은 56년 치러진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후보단일화 협상 중이던 민주당 신익희후보가 열차에서 급서하자

단일화 논의는 중단됐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그는 비록 낙선했지만

이승만이 얻은 500만 표의 절반에 가까운 216만 표를 얻으며 파괴력을 발휘했다.

후보단일화가 성공했을 경우를 가정하면 우파 자유당을 경악하게 만드는

득표율이었다.
선거 후 조봉암은 국민 지지를 바탕으로 진보당을 창당했고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평화통일론을 주창했다. 위기를 느낀 이승만 정권이 두려운 정적으로 떠오른 그를

방치하지 않았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이승만은 평화통일론을 구실삼아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붙였고 조봉암은 결국 진보의 싹을 틔워보지도 못한 채

59년 2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다.

2007년 참여정부의'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조봉암의 처형을

정치탄압으로 규정했고 대법원은 2011년 1월 20일 열린 재심 재판에서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 선고를 내렸다. 실로 반세기가 넘어서야 누명을

벗은 것이다.

죽산조봉암(竹山曺奉巖)

조봉암 선생은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 장관 국회 부의장을 거쳐 진보당 당수이며

1956년 제3대 대통령에 입후보하여 30%의득표를 얻었다.

 

고당 조만식(古堂 曺晩植)

조만식 선생은 조선일보 사장을 거쳐 독립운동(獨立運動)을 지표(指標)로

민족운동(民族運動)을 주도하였다.

 

2000년 1월 南冥 曺植先生 後裔 曺憲燮 署


 

'조봉암 사건' 52년 만에 대법원 무죄 선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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