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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일지(121)/산행일지(118)

장기읍성 동악산 둘레길

by 석암 조헌섭. 2018. 9. 3.


1,장기읍성 둘레길(포항


대덕 산악회 제269차 산행 2018년 9월 2

 

참석인원 36명


본 산악회는 안전사고에 대한 책임이 없으므로 안전에 완벽을 기해 주시길 바랍니다.



등산코스=장기면 사무소-장기읍성-동악산 정상-왕복 5k


읍성은 지방의 관아와 민가의 취락지를 함께 둘러서 쌓은 성인데, 장기읍성은 

산정에 있으면서 읍지로서의 기능을 갖추고 있어 읍성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 기록에 의하면 고려 현종 2년(1011)에 

동으로는 왜적, 북으로는 여진족으로부터의 방어를 위해 토성을 처음 쌓았고 

조선시대 세종 21년(1439) 석성으로 다시 쌓았다고 한다.


성의 형태는 타원형으로 둘레가 1440m이며 3개소의 성문과 옹성, 그리고 치성을 

갖추고 있으며 4개소의 우물과 2개소의 연못인 음마지가 있다. 

성내에는 교육기관인 장기향교와 동헌터가 있는데 동헌은 면사무소 안에 이전하여 

보호하고 있다.'

장기읍성은 정약용, 송시열 선생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의 유배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장기읍성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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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가 옛날에는 참으로 오지였겠구나, 그러니까 유배지로 정해졌겠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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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향교



2, 장기 유배문화 체험촌






















 

▶3, 경주 안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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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안압지 연꽃길




안압지내 백일홍



▶3, 포석정

포석정에 관한 해설을 듣고있다.



유상곡수


옛날 선비들은 풍류로써 세상을 구하리라 생각하였단다.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에 일국의 현모지도(玄妙之道)가 풍류에 있다고 하였으니 
풍류 중에서도 왕희지의 “유상곡수(流觴曲水)”로 흐르는 물에다 술잔을 
띄워 보내면 그 술잔을 받는 사람이 시를 지어 화답하는 놀이인데
경주의 포석정도 시를 지어 노래했던 곳이다.


술 항아리에 신선이 있다고 하는데, 기분 좋게 취하면 이 몸도 한잔 또 한 잔에 
얼큰하게 취해  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는

옛친구와 또 언제 완월장취(琓月長醉)나  할랑가…




경주 교동 최 부잣집

명당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명당엔 양택과 음택이 있다고 한다.

음택은 묏자리인데 좋은 자리를 잡으면 여러 대까지 복이 이어지지만,

집터를 가리키는 양택은 보통 당대에 끝이 난다고 한다.


그러나 양택일지라도 복이 여러 대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덕을 베푸는 경우가 이에

해당 한다.

300년 동안이나 만석지기로 이어온 경주 교동 최 부잣집이 대표적인 예이다.


중국 명나라 말기의 학자 육상객은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생활의 덕목을 여섯 가지로 말하고 있다.


자처초연(自處超然)-자기집착에서 벗어나고,

처인초연(處人超然)-남에게 온화하게 대하며,

유사초연(有事超然)-일이 있을 때에는 활기에 넘치고

무사초연(無事超然)-일이 없으면 마음을 맑게 하며,

득의담연(得意擔然)-성공하여 만족할 때에는 담담하게 살라 하고,

실의태연(失意泰然)-실패했을 경우에는 침착하게 살라고 한다


이것을 육연(六然)이라 하여 경주 최부자 집의 수신가훈으로 인용되어졌다.

또한, 독립운동가 애연 이인 선생은 3불을 더하여 육연삼불(六然三不)로서

상황에 따라 처해야 할 생활철학으로 여겼다.


이인(李仁`1896~1979`) 선생의 3불이란!

불노불소(不怒不笑)-함부로 화내지 말고 웃지도 말아야,

불급불완(不急不緩)-바쁘지도 느리지도 말아야,

불허불영(不虛不盈)-비어있지도 채우지도 말아야 연(然)한 삶이 이루어지니...

신용불식향이(神龍不食香餌)요, 채봉불입조롱(彩鳳不入雕籠)이라.

"신령스런 용은 맛있는 먹이를 탐내지 않고, 기품 있는 봉황은 새장이

예쁘다고 들어가지 않는다."



경주 최부잣집 집안을 다스리는 육훈(六訓)

 

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   1대 최진립

 최부잣집은 12대 중, 9대의 만석에다 9대의 진사가 나온 셈이다.  

 이 집안에서는, 벼슬이 높아질수록 당쟁에 휘말릴 확률도 높고 감옥이 가깝다는

사실을 통찰하고서, 경제력 하나만으로 수신제가하여 국가사회에 이바지하는

것으로 사람의 도리를 다하겠다는 포부인 듯하다. 

 

 2. 재산은 석 이상을 모으지 말라   4대 최의기

두번째 철학은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신념이 철저했다.

대체로 당시의 소작료가 수확량의 70% 정도였는데, 최부잣집은 50% 이하로

끌어내렸다. 

소작료가 저렴하니까 소작인들이 앞을 다투어 최부잣집 농사를 지으려고 줄을 섰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팠지만 최부자가 논을 사는 데는 박수를 쳤던 것이다.

최부자가 논을 사면 자기들도 상생의 이치로 먹고 살기가 나아졌기 때문이다.

 

3, 과객은 귀천을 구분하지 말고 후하게 대접하라  4대  최의기

 과객들이 묵고 가는 사랑채에는 독특한 쌀뒤주가 있었다.

두손이 겨우 들어가도록 입구를 좁게 만든 뒤주였는데, 누구든지 두 손을 넣어서

쌀을 가져갈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과객들을 통해 최부잣집의 높은 덕망이 전국으로 퍼져 나갔던 것이다.  


4,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말고 파장 때는 물건을 사지 말라 3대  최국선

 흉년이 드는 해면 수 천명씩 굶어 죽어가는 때였다. 가난한 사람들이 당장

굶어죽지 않기 위해 헐값으로 내놓은 전답을 매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죽빼미논’까지 등장하기도 했는데,

 

죽 한 그릇을 얻어먹고 논 한 마지기를 내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부잣집은 이런 짓이라곤 꿈에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실로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건을 살때도 언제나 일찍 제값을 주고 샀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제일 좋은 물건을 먼저 최부잣집으로 가져왔다.

최부잣집과 이웃들 사이에는 그만큼 신뢰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5,가문에 시집온 며느리들은 3년동안 무명옷을 입도록 하라 6대최종률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동안 무명옷을 입어야 하는 원칙을 지켜왔다.

부잣집 자부들의 근검절약과 이웃에대한 배려가 매우 철저했던 것이다.

보릿고개 때 새댁들은 쌀밥을 먹지 않고, 은수저도 사용하지 않았다.

검소하게 옷을 누덕누덕 기워입고 하수인들과 함께 부엌일을 했다. 

시키기만 하는 게 아니라 함께 일을 했던 주인들의 자세로 익어졌다.

 

6,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3대  최국선

 최부잣집의 사랑채는 한꺼번에 백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그래도 방사가 모자랄 때면 주위의 소작인들 집으로 식량과 반찬을

보내어 숙식을 제공해 주도록 하고, 대신 소작료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것이 마치 우애로운 한 집안 같아서 참 훈훈하게 느껴진다.

최부잣집의 한 해  식량의 소비량이 대략 3000석이었는데, 

1000석은 식구들 양식으로, 1000석은 과객들의 접대로,

나머지 천석은 100리 안 이웃들을 돌봐줄 몫이었다.


12대.최 준(1884~1970)느닷없는 한일합방(1910년)으로 나라를 잃게된다.

 최현식은 당시 20대인 최준에게 살림을 넘긴 후, 출입을 끊고 매일 아침북쪽을

향해 곡을 했다.

  '조선국권회복단'에 경주군 대표로 활동하며 자금을 대다가 투옥되기도 한다.

다시 백산 안희제를 만나 백산상회를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해 오다가,

드디어 1945년, 꿈에도 그러던 광복을 맞이했다.

 400년을 이어온 부를 이제 영원히 보존할 길을 찾아 고심하던 끝에 육영사업에

전 재산을 내놓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최준은 만석지기 토지와 살고 있던 집까지 모조리 학교재단으로 희사한다.

 당시는 대구대학이었으나 숱한 우여곡절을 거쳐 지금의

영남대학교로 성장한 것이다.

                 

해방이 되었으니 일경의 감시도 없고  전 재산을 희사했으니 도둑 들 일도 없어서

이제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살겠다는 말을 남긴 채

최준은 1970년 10월, 마지막 최부자의 막을 내리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만석꾼보다 독립유공자 자손으로 받는 25만원의 연금이 더

자랑스럽다는 후손들…

 이제 최부잣집은 우리들 기억 속에 고이 간직되었다가 우리 함께 복을 누리는

그런 세상이 오기를 학수고대 기다려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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