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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124)

왕의초상화에 담긴역사

by 석암 조헌섭. 2012. 8. 9.
왕의초상화에 담긴역사

임금 얼굴을 그린 그림을 어진(御眞)이라고 한다. 어진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었다.

 하나의 국책사업이라고 할 만큼 공력과 시간을 들여 제작해야 하는 게 어진이었다.
어진을 그린 화사(畵師)들은 당대 최고 화원들로 구성됐다. 예를 들어 정조의 어진을

그린 화사들 면면을 보자.

초상화 얼굴 부분을 그리는 주관화사는 이명기였고, 그 외에 몸체 부분을 그리는

 동참화사는 김홍도, 채색을 도와주는 수종화사는 김득신 허감 한종일 신한평

 이종일로 구성돼 있었다. 모두 당대 대표 화원들이었다. 천하의 김홍도가 주관화사가

 못 되고 동참화사로 참여한 것만 봐도 조선이 어진 제작에 들인 열정을 알수 있다.

초상화 전문가이자 문화체육관광부 영정심의위원인 조선미 교수(성균관대 미술학과)

가 쓴 `왕의 얼굴`은 한국의 어진, 더 나아가 한ㆍ중ㆍ일 3국 왕들 초상화를 집중적

으로 연구한 의미 있는 저술이다.

모든 그림이 그렇겠지만 특히 왕의 초상화는 그려진 시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따라서 왕의 초상화에서는 당시 시대 상황, 숨겨진 정치적 의도 등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우리나라에서 왕의 초상화는 매우 사실적이다. `털끝 하나라도 틀리면 그 사람이

 아니다(一毫不以 便是他人)`는 조선 전통사상 때문이었다.

 글씨 하나도 그 사람을 말해준다고 믿었던 조선 사람들에게 왕의 어진은 곧 왕이었다.

 어진은 단순한 그림이 아닌 왕권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강력한 조형물이었다.

따라서 제작뿐만 아니라 관리나 보존에 있어서도 각별했다. 사고로 영정이 불에 타거나

 하면 당시 왕이 소복을 입은 채 백관을 거느리고 사흘간 곡하며 위안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다.
사실적으로 그리다 보니 조선 어진에는 왕의 당시 심경이나 성격이 잘 드러난다.

380180 기사의  이미지영조 초상화(왼쪽)에서는 깐깐한 성품과 권위가 느껴진다. .

청나라강희제(가운데)는 서재에 있는 모습을 그리도록 해 자신이

 만주족이지만 유교 교양을 지니고 있음을 과시하고자 했다. 

막부 권력에 짓눌려 있던 일본 왕들은 온화하고 조용한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림은 도바 일왕상(오른쪽).

과거에 있던 그림을 모사해 내려온 이모본(移模本)이기는 하지만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 어진에서는 무인의 기풍이 그대로 느껴진다. 앉아 있는 용상 크기와 몸집을

 비교해보면 키가 상당히 큰 것을 알 수 있고,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눈에는 정기가

 넘치며 얼굴에는 위엄이 서려 있다.

긴 시간 보위에 있었던 영조 초상에서는 자신만만하고 권위적인 느낌이 든다.

눈꼬리는 다소 처져 있지만 51세 나이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날카로워서 깐깐한

성품이 엿보인다.

재미있는 건 영조가 연잉군 시절인 25세 때 그린 초상화에서는 그런 자신감이 안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천한 무수리 아들로 태어나 미래를 보장할 수 없었던 시절,

젊은 연잉군 얼굴에서는 자신감보다는 불안감이 더 드러나 보인다.

강화도에서 평범한 농군으로 살다가 19세 때 갑자기 즉위한 철종 얼굴에서는 서글픔이

 엿보인다. 수렴청정과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각종 민란 등에 시달린 불안한

 심리상태가 엿보인다. 철종의 대를 이어 보위에 오른 고종의 초상에서는 격동기를

 근근이 버티고 있는 지친 표정이 드러나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중국은 우리와 달리 정치적 선전물로 왕의 초상이 종종 활용됐다. 다양한 민족이

 뒤엉켜 살았던 중국에서는 특정 민족이 세력을 잡으면 그것을 여러 이민족에게

 알리고 권위를 인정받아야 했다.

그래서 사연 있는 초상들이 종종 등장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는 강희제 초상이다.

자신이 유교적 교양을 지닌 군주임을 애써 강조하는 듯한 모습이다.

만주족 출신이라는 콤플렉스를 감추고자 했던 것이다.

명나라 때 왕들의 초상은 흉측할 정도로 얼굴이 울퉁불퉁하게 그려진 것이 많다.

오악(五岳)을 길하게 보는 당시 믿음 때문인데, 얼굴에도 그것을 적용해 코와 양쪽

광대뼈, 이마와 턱 등 얼굴 5군데를 두드러지게 그리다 보니 흉측한 얼굴이 된 것이다.

일본도 흥미롭다. 쇼군이 통치하는 막부 때문에 기를 펴지 못했던 일본 왕들 초상은

 기개가 넘치거나 용맹스럽지 않다. 흡사 동자승이나 여인을 연상케 할 정도로

 부드럽게 그려져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렇듯 위정자 표정에서는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다. 세월이 한참 흐른 다음 우리

 후손들도 지금 위정자들 사진이나 그림에서 어떤 단서를 찾으려 할 것이 분명하다.

                                      [허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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