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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124)

서계 박세당(西溪 朴世堂1629~1703)

by 석암 조헌섭. 2018.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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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세당(西溪 朴世堂1629~1703) 


서계선생영정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은 반남박씨로

 박응주(朴應珠)를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고려말 향리가문에서 출발하여

 조선후기에는 당대 최고의 문벌가문으로

 발전한 가문으로 박세당의 10대조인

 박상충(朴尙衷1332-1375)에 이르러


 사대부가문으로 성장하였으며 그의 아들

박은(1370-1422) 대에 이르러 문호가

 더욱 신장되었다.

서계가문이 반남박씨 대종(大宗)으로부터 분리되어 독자적인 계파를 형성한

 것은 서계 선생의 조부인 박동선(朴東善1562-1641) 대(代) 이다.

박동선은 1589년(선조 2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인 1590년 문과에 합격하여

 검열, 설서, 정언, 대사간, 대사헌, 이조참판, 형조판서 등 을 거쳐 숭품(崇品)의

 의정부 좌참찬을 역임하였다. 


박동선의 외아들인 박정은 나라에 큰 공로를 세움으로 서계가문의 유족한 삶의

 바탕을 마련하게 되었다. 박정은 1615년 (광해군 7) 진사를 거쳐

 1619년(광해군 11)에는 문과에 합격하였다. 하지만 광해군의 난정, 대북정권

 전횡, 그리고 이와 관련 한 아버지의 수난을 겪는 과정에서 그의 나이 27세에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마침내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等)에 책훈되고

 금주군(錦 洲君)에 봉해지게 된다.


정사공신교서에 따르면 박정에게 주어진 상전(賞典)은 도상(圖像), 구사(丘史),

노비(奴婢), 표리(表裏), 금(金), 내구마(內廐馬) 등과 60결(結)에 달하는

방대한 전답이었다. 이는 각종 공예품과 옷감, 노비, 금, 사패지(賜牌地) 등 실로

 많은 것이었다. 


서계는 1629년(인조 7) 8월 19일 남원부(南原府) 관아에서 박정과 양주윤씨

 사이에서 4형제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서계 박세당의 출생은 이처럼 출중

 아버지와 조부에 따라 유복한 가정에서 시작되었지만 그의 인생은 평탄치 못했다.

  
그의 나이 4세 되던 1632년(인조 10) 반정의 공으로 출세를 보장받았던 아버지가

조부보다 먼저 세상을 여의면서 불운이 시작되었고, 이로부터 3년이 지난

1635년(인조 13)에는 장형마저 사망함으로서 집안에는 상화(喪禍)가 겹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듬해인 1636년에는 병자호란이 발생하여 소년시절의 박세당은

 할머니와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길에 올라 전국 각지를 전전해야만 했다.


 전쟁이 진정되자 다시 서울로 올라와 중형의 문하에서 공부하던 때에 조부

 박동선의 상을 당하게 되자 집안에는 3대과부(할머니, 어머니, 큰형수)가 생겨

 나게 되었으며 가세가 점차 기울게 되었다. 
한편 서계 선생은 1645년(인조 23) 의령남씨와 혼인을 하고 약 10년의 세월동안

남씨 친정에 의탁하여 지낸다.


이는 당시 남귀여가혼 (男歸女家婚)이라는 유습도 있었지만 집안의 가난도

 큰 요인이었다. 
서계는 처가에서 공부하면서 향후 학자로 대성하는 밑거름을 형성하였다.

 하지만 한창 과거 공부에 집중할 무렵인 21세에 어머니를 여의게 되고,

 22세에는 할머니와 3형 세후의 상을 당하게 된다. 어린시절부터 청년시절까지

 많은 슬픔과 아픔을 겪게 되지만 스스로를 정진하고 학문연구에 소홀하지 않았다.


1660년(현종 1) 마침내 서계는 여름에 열린 식년 사마시에서 7등으로 합격을 하고,

 겨울에 현종대왕 즉위를 기념하는 증과 별시에서 당대의 수재들을 재치고

 장원급제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장원급제라는 과경(科慶)은 개인의 영광은

 물론 집안의 경사였기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명부를 적는 방목에는 부모와

 형제를 함께 기록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를 기뻐해줄 부모와 조부모는 세상에 남아 있지 않았다. 
장원에 1등으로 합격한 서계는 관례에 따라 성균관전적(정6품)에 임명되었다.

이후 그는 예조ㆍ병조의 좌랑, 춘추관 기사관, 사간원 정언 등 중앙의 요직을 두루

 거치게 된다. 1663년(현종 4)겨울에는 강화도에 어사로 파견되어 군비를 점검하는

 중역을 수행하였으며, 옥당(홍문관)의 학사가 되어 왕명을 대찬하고 경연관으로

 활동하였다.


경연(慶筵)은 임금이 학문을 닦기 위하여 신하들 중에서 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을 궁중으로 불러 경적(警笛)과 사서(史書) 등(等)을 함께 논의하고 강연한

 것으로

 임금을 아주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직책이다. 
서계 선생의 이와 같은 출세는 그의 강직한 성품과 어울려 더욱 진전하게 된다.


하지만 화려한 출사는 환해부침(宦海浮沈)이라 는 말처럼 요동이 일게 된다.

 1664년(현종 5) 조정을 술렁이게 했던 공의(公義)ㆍ사의(私義) 논쟁은 관료

사회에서 그가 삼간오사(三奸 五邪)라 불리는 수모를 겪게 했다.

 이 일로 그는 관료사회의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현종의 잦은 온천여행으로 온행(溫行)을 자제할 것과 이에 따른 폐단을 직언하고

 나아가 국왕과 대신의 직무 태만, 왕실의 재물낭 비 등을 거리낌없이 거론하고

 국정의 쇄신을 요구하였다 서계는 점차 정치에 혐오를 느끼게 된다.

 이에 더해 1667년(현종 8) 6월, 부인 의령 남씨의 때 아닌 사망을 접하게 되자

 서계는 더욱 큰 충격을 안았다. 

 
서계 인생의 후반부가 이렇게 질곡에 이르자 그는 일치감치 영욕을 떨치고,

 현실세계에서 한발 떨어진 곳에서 여생을 보내고자 하였다.

박세당이 양주 수락산에 들어와 은거를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40세 되던

 1668년(현종 9)이었다.


수락산은 삼각산, 도봉산과 더불어 서울 외곽의 3대 명산으로 예로부터

 문인(文人)과 묵객(墨客)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유산(遊山)의 명소이자 휴식의

 공간이었다. 
수락산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이 주인노릇을 한 곳으로 유명했다.

 서계 역시 매월당을 기리는 추모사업과 더불어 수락산 곳곳에 자신의 발자취를

 남기는 사업을 시작한다.


서계는 그곳에서 철학자적인 깊은 고뇌와 사색을 이루어 수많은 저술활동

 펼치기도 하였다. 박세당은 41세부터 관직(官職)에 나아가는 것보다는 석천동에

 은거하면서 강학(講學)과 고전(古典)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10여 년이 지나고 그의 역작이라 할 수 있는『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하게 된다.


이는 조선의 성리학이 중국 중심의 학문 태도를 보이는 것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과 더불어 주자학을 비판하는 등 성리학을 재해석한 독자적인 견해를 과감히

 설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대다수의 조선의 성리학자와 성균관 유생들은

 서계의 견해에 대해 지탄하는 상소를 올려 말년에 유배를 가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서계(西溪)는

이외에도 『신주도덕경(新註道德經)』,『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註解刪補)』의

 저술을 통해 당시의 주자학과 함께 도가(道家) 사상에도 상당한 식견을 보여준다.

또한『색경(穡經)』은 농업서적으로써 그의 실학적(實學的) 성격을 강하게

 보여주는 저술이기도 하다. 이는 박세당 본인의 저술이기보다는 여러 글을 엮은

 편술(編述)의 성격이 강하지만, 그의 실학자적인 실천적 성향을 볼 수 있다.

 
서계 박세당은 1703년 4월 이경석의 신도비명과 그의 저술 사변록으로 인해

성균관유생의 탄핵을 받고 노론으로부터 사문난적(斯文亂 賊)의 낙인이 찍혀

 관작을 삭탈당하고 유배의 길에 오르게 된다.

 판윤 이인엽의 상소로 풀려나 5월에 석천동으로 귀향하지만 병이 점차 심해져

 8월 21일에 정침(正寢)에서 서거한다.


서계선생의 학문과 신념은 아들 박태유와 박태보로 이어져 큰 아들 박태유는

 효자로써 필명을 날렸으며, 둘째아들 박태보는 장원급제로 조정에 나아가

 충신으로서 명성을 올렸다. 셋째 아들 역시 한성부판관의 관직에 이르렀다.


이들 형제 이후에도 서계의 자손들은 대대로 문한(文翰)을 유지하며 근기

 소론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한말까지 무려 2,500여 

(400여종)의 전적을 보유한 선비집안이자 학자집한의 가성을 지켜왔다.

이처럼 누대로 지킬 수 있는 정점에는 항상 서계가 있었던 것이다.


2000년에 11대 종손 고 박찬호(朴贊鎬)씨에 이르러 서계가문 소장 전적과

 고문서 둥 558점의 기록을 現 한국학 중앙연구원(舊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기탁하여 보존 및 관리하고 있다. 2004년 1월에는 문화관광부 인가를 받아

 서계문화재단을 설립하였고 현재 12대 종손이신 박용우씨가 재단이사를 맡고

 있으며 종부 김인순씨가 내외로 돕고 있다. 슬하에는 2남을 두고 있다.

 
※韓國精神文化硏究院, 古文獻 寄贈ㆍ寄託目錄 1,『西溪 朴世堂 宗宅 寄託典籍』

참조 작성.                                                   

서계 박세당 사랑채
서계 박세당 사랑채 

서계의 문과 장원급제 홍패

사변록표지

 서계의 문과 장원급제 홍패

 사변록표지


               

서계묘역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과 두 부인 묘역

석천경영의 삶                            

서계 박세당이 양주 수락산에 들어와 은거를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40세 되던

 1668년(현종9년)이었다. 박세당의 석천동 생활은 단순한 삶이기보다는

 경영이라 할 정도로 수락산 자락 일대에 그의 몸과 마음을 새겼다.


한 시대를 풍미한 통유(通儒)였던 매월당 김시습을 추모하는 사업을 그의 말년과

 후대까지 이르게 하였으며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생활로 수많은 시가 석천에서

 지어졌다. 당시 지어진 수백편의 시는 「석천록(石泉錄)-상,중,하」로 묶여져

 『서계집(西溪集)』에 수록되었다.


박세당 은거 이후 수락산은 내방객들이 끊이지 않았다. 남구만, 윤증, 박세채,

 최석정, 최석항, 최창대, 조태억 등 소론계열의 인사들이 찾았다. 많은 친구,

문인들과 교류하였고 자제와 함께 수락산과 석천동 일대를 유람하였다. 

서계(西溪) 상류에서 하류에 이르는 일대는 서계의 석천경영을 위한 드넓은 무대로

 가득했다. 산천과 수석에 대해 각기 이름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집 주변의 샘을

 석천(石泉)이라 하고 아예 동네이름을 석천동(石泉洞)이라 일컫고 바위에

 ‘석천동(石泉洞)’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이외에도 서계가 즐겨 찾았다는 ‘취승대(聚勝臺)’와 처남 매부지간이었던

 남구만이 쓴 ‘수락동천(水落洞天)’, 넓은 바위에 새긴 ‘서계유거(西溪幽居)’ 와

같은 암각서들이 서계의 석천동 발자취를 말해준다.

또한 학문과 토론을 위해 지었던 궤산정이 근래에 보수되어 남아있고,

매월당 김시습의 영정을 모시기 위한 청절사(現 노강서원 基)와 정자인 청풍정,

 석림사 등 많은 유적지들이 남아있다. 

서계의 수락산과 석천동 일대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은 그의 학술연구와

 저서에서도 나타난다. 조선후기 대표적인 유학자로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주자학 일변도의 경전해석에 머물지 않고, 노장학을 넘나드는

 폭넓은 학문세계를 지향하였다.


그의 글을 모은 “서계집”, 별도의 단행본으로 묶여진 “사변록”, “신주도덕경” 등은

 서계의 학문세계를 반영하는 대표적인 저작이다. 그의 정밀하고 분석적인 사고는

 유학분야에만 머물지 않았다. 농사에 관한 경서로 지방의 농경법을 연구하여

 꾸민 농법기술서인 “색경(穡經)”은 백과전적 농서의 선구격으로 농학체계화에

 업적을 이루었다. 서계의 실천적인 실학자적 면모를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서계선생이 연로할 때 남긴 “계자손문(戒子孫文)”을 통해서는 일생의 역경을 딛고

 가다듬은 가치관과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서계가 타계(他界)하기 6년 전인 1697년,

한질이 심해지자 자손들과 후손들에게 당부의 말을 남긴다.

 
“3년 상식(上食)을 폐지할 것, 일상 만사에 조심하여 명을 단축하는 일이 없도록

 근신할 것, 형편에 맞는 제사음식과 사치하지 말 것,

 ‘논어’의 말씀을 따라 충(忠)과 신(信)을 주장으로 매사에 정성과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다운 행실을 할 것,


 경서와 역사책을 독파하여 고금을 통하는 착한 선비가 될 것, 글을 소리 내어 읽되

 그 뜻과 이치를 함께 익힐 것, ‘중용’에 있듯이 배우고 물으며 분별함과 행동함에

 독실 할 것, 끝으로 형제간은 동기간이니 우의를 돈독히 하여 집안의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늘 어진 형제관계를 유지할 것” 등을 유서로 남겼다. 

현재 12대 종손에 이르기까지 계자손문의 말씀을 지켜오고 있으며 이를 담은

 소책자를 만들어 문중 친인척들에게도 나누어 공유하고 있다. 
서계는 수락산 자락에서 매월당 김시습을 추모하는 것을 시작으로 자연 속에서

 정쟁의 시름을 덜며 강학과 학문연구를 드넓게 펼쳤다.

가문의 업적을 지켜나가는 서계 박세당 종가

서계 11대 종손 박찬호(朴贊鎬·서계문화재단 설립자)씨는 공직생활을 마치고

 이곳을 관리하여 오다가 서계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현창하는 것이 자손의

 도리임을 깨닫고 문화재단의 설립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박찬호씨는 이에 앞서 2000년도에 조상대대로 간직하여 온 유물과 고문서,

 고서 등 558점을 한국정신문화연구원(現한국학중앙연구원)에 위탁 관리를

 맡기기도 하였다. 서계문화재단은 문화관광부의 설립인가를 득하여 2004년

 1월 20일 설립되었다.


그리고 현재는 12대종손 박용우(朴龍雨 ·58·서계문화재단이사장)씨와 종부

 김인순(金仁順·55·서계문화재단 운영위원)씨 내외가 맡고 있다.

 재단의 위치는 종가댁인 서계 박세당 가옥 바로 옆에 신축되었다. 

재단 설립의 목적은 서계 박세당 선생에 대한 학술연구 활동 및 유물,

 유적의 보존과 복원관리를 목적으로 한다. 서계에 대한 연구논문, 저술활동을

 지원하고 서계저술의 주해, 번역, 발간을 담당한다. 학술대회와 학술강연회를

 주최하고 후원하는 것 역시 포함된다. 

고택에서의 삶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기제사 9회, 불천위제사, 절기별 제사 등

 대부분의 종가처럼 제사가 많다. 더욱이 고택을 보존하고 그곳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옛 조상들의 고택생활을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하는 불편함이 뒤따른다. 

요즘 같이 물질적 가치를 앞세우는 세상에 부부가 한 뜻이 되어 조상의 정신문화를

 가꾸고 전승시키려는 노력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서계선생의 뜻을 잇고

가문의 업적을 지켜나가 종손의 소임을 다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전통문화가 명맥을

 이을 수 있다. 

서계 박세당 가옥
서계 박세당 가옥
※ 서계문화재단 홈페이지(http://www.seogye.com)
석촌동 주변 서계관련 문화 유적지

취서대는 서계 박세당(西溪 朴世堂1629~1703)선생이 은거 당시에 가장 즐겨

 찾던 장소 집 주변에 있던 취승대는 동계(서계, 西溪라고도 함) 좌우에 위치한

 4개의 자연석(東臺, 南臺, 西臺, , 北臺)으로 천하의 승경을 취합해 놓은 듯한

 아름다운 장소라는 뜻이다. 

서계 선생은 틈만 나면 지팡이를 짚고 취승대로 나들이를 떠났다. 
봄이면 동대에서 꽃을 감상하고, 여름이면 남대에서 바람을 쐬고,

가을이면 서대에서 달을 감상하였으며, 겨울이면 북대에서 눈을 가지고 놀았다.

서계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렇다고 동대에 달이 없는 것이 아니고, 

서대에 꽃이 없는 것도 아니며, 남대에 눈이 없는 것이 아니고, 

북대에 바람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고 할 정도였다.
취승대는 4대 어디에서건 풍(風), 화(花), 설(雪), 월(月)의 4경을 만끽할 수 있는 

아름다운 조망대였던 것이다. 이 점에서 취승대는 서계에게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일상의 공간이었으며, 자연과 교감하며 심신을 달래는 휴식의 공간이었다. 

지금도 서계종택 옆에 4대(臺)가 남아 있고 북대(北臺)에는 서계가 직접 쓴 

‘취승대(聚勝臺)’ 라는 글자가 선명히 새겨져 있어 서계 선생이 한가로이 

사색에 잠겼던 예전의 향취를 고스란히 떠올리게 한다.


 박세당(朴世堂1629~1703)선생이 수락산  취승대에서

취승대기(聚勝臺記)와 화풍월설(華風月雪)을 줄여서 쓴 시 한 수를 올려본다.


취승대기(聚勝臺記)

상화어동대이춘(賞花於東臺以春);봄에는 동대에서 꽃을 감상하고 

영풍어남대이하(迎風於南臺以夏);여름엔 남대에서 바람을 쐬며

요월어서대이추(邀月於西臺以秋);가을엔 서대에서 달을 맞이하고 

완설어북대이동(翫雪於北臺以冬);겨울에는 북대에서 눈을 완상한다


화풍월설(華風月雪) 

농영조안열기연(濃艶照眼悅其姸);농염한 꽃잎이 눈에 보일 땐 그 예쁨을 즐기고 

미량세면희기청(微??面喜其淸);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칠 땐 그 맑음을 기뻐하며

성호필견애기명(纖毫畢見愛其明);달이 떠 만물이 다 드러날 땐 그 밝음을 사랑하고 

점진불착호기결(點塵不着好其潔);눈이 내려 티끌조차 붙지 않을 땐 그 깨끗함을

                                             좋아 한다.

시유무술동절록(時維戊戌冬節錄)취승대기(聚勝臺記) 화풍월설(華風月雪)♥昔暗조헌섭♥




영천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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