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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463)

'도망시(悼亡詩) 1,’

by 석암 조헌섭. 2020. 6. 21.

'도망시(悼亡詩) 1’

'망시(悼亡詩)’ 는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는 시(詩)다.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는 시를  '도망시(悼亡詩)’라 한다.  

나장월모 송명사(那將月老訟冥司)--어떻게 월로를 불러 저승에 호소하여 
내세부처 역지위(來世夫妻易地爲)--내세에는 그대와 내 자리 바꾸어 태어날 
아사군생 천리외(我死君生千里外)--나는 죽고 그대는 천 리 밖에 살아서 
사군지와 차심비(使君知我此心悲)--그대로 하여금 이 슬픔을 알게 했으면…


조선 시대 최고의 명필로 추앙 받는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선생이 아내 
예안 이씨의 죽음 앞에서 지은  '도망시(悼亡詩)이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제주도 대정현에 유배된 지 3년 되던 해에 부인
예안 이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유배지(流配地)에서 듣고 통곡하며 지은
 시다.

추사는 제주 유배지에서 아내에게 자주 편지를 썼다. 
아내가 병든 뒤에는 더욱 자주 편지를 보냈다. 
음식은 제대로 먹는지, 약은 제대로 쓰고 있는지 걱정이 많았다.


1842년 11월 제주도에 귀양 중이던 추사는 병중의 부인에게 병세를 묻는 편지를 
보낸다.  그리곤 아내로부터 소식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아내의 죽음을 인편에 듣고 추사는 원통(寃痛)한 마음을 담아 
도망시(悼亡詩)를 썼다고 한다. 

추사는 15살 때 동갑내기인 한산 이씨와 결혼했지만 안타깝게도 5년 후

상처(喪妻)를 하여 23살 때 예안 이씨와 재혼한다. 
하지만 슬하에 자녀가 없었던 추사는 양자를 들여 육십이 돼서야  부모 소리를
들었다'고 기뻐했다.

그러나 두 번에 걸친 10년의 귀양 생활과 아내의 죽음으로 말년을 쓸쓸하게 보낸
추사에게 단란한 가족(家族)은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추사 고택 기둥에 

(大烹豆腐瓜薑菜), 가장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고
(高會夫妻兒女孫), 가장 훌륭한 모임은 부부, 아들딸, 손자의 모임이다. 라는
                         주련이 걸려있는 것도 추사의 가정이 쓸쓸했기 때문이다. 

천하의 명필(名筆)이지만 추사는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는 알아보기 쉽도록
일부러 한글로 써서 보냈다고 한다.  
만시(挽詩)는 죽은 사람을 애도하기 위한 시다. 만시(輓詩)로 쓰기도 하는데, 
끈다는 뜻으로 상여를 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한 마음을 마음껏 드러낼 수 없는
처지였는데, 아내가 죽을 때 짓는 도망시만큼은 체면도 위엄(威嚴)도 모두
내려놓을 수 있었다고 한다. 

조선 최후의 문장가로 손꼽히는 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 1852년~1898년)은
22세에 요절한 아내 서씨를 위해  ‘내 집에 살아도 손님만 같구려’라는 시를 썼다.

술잔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살평상엔 먼지만 가득히 쌓였소. 
다시 차마 중문으로 들어가 보지만
내집에 살아도 소님만 같구려  

내 어찌 일찍 벼슬하기만을 바라겠소만 
이제야 조금 알아 고향으로 돌아왔건만
박복한 당신 향수를 누리지도 못했는데 
지금 문앞에는 햅쌀 향기만 그득 하구려  

아이는 어려서 곡을 할 줄 몰라서 
곡성이 글 읽는 소리와도 같다가 
갑자기 엉엉 울며 멈추지 않더니 
하염없는 눈물만 구슬같이 흘렸소

  이처럼 죽은 부인을 애도(哀悼)하는 시를 도망시라 하는데, 
일종의 사부곡이라  할 수 있다.         

                                      2020년 6월 일
                                       석암 조 헌 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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