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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일지(121)/산행일지(118)

갈기산(585)-월영산(529) 선비문화 탐방길(함양)

by 석암 조헌섭. 2013.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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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갈기산(585)-월영산(529)

2013년 10월 6일 대덕 산악회

참석인원=28명

산행코스 : 바깥모리주차장~헬기장~갈기산(485)~월유봉(590m)~말갈기재~소골재~성인봉(545m)~비들목재~자사봉(458m)~안자봉(484m)~월영산(528.6m)~서봉(503m)~68번 지방도로(금산군 제원면 천내리)
갈기산

울퉁불퉁한 바위능선길이 마치 갈기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바위가 많은 산으로 한 폭의 그림같이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고 있는 산이다.

해발 585m의 나즈막한 산이지만 능선 좌우에는 절벽지대가 많으며 날등길과 암릉길은   릿한 스릴을 맛보면서 아기자기한 산행을 즐길 수 있으며 수려한 금강의 굽이치는       물줄기를 감상할 수 있는 산길이다.

 금강을 중심으로 마주하고 있는 천태산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명도는 떨어지지만

 금강의 푸른 물줄기를 굽어보며 말갈기 능선을 걷는 그 순간만은 하등

 손색이 없는 산이다. 

  암봉으로 이루어져 있는 갈기산 정상에 서면 사방으로 막힘이 없는 시원스러운 조망이

 펼쳐진다. 북서쪽으로는 금강 너머로 천태산, 국사봉, 서대산이 한눈에 바라보이고,

 북동쪽은 암릉을 이루고 있는 동골산과 그 너머로 마니산이 우뚝 솟아 있다.

 

동쪽으로는 민주지산, 남쪽은 덕유산 주릉이 아물거리고 있다.

 월영봉은 갈기산 서쪽에 있는 산으로 갈기산과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영동군 양산면과

 금산군 제원면의 경계상에 있는 산으로 갈기산과 연계하여 산행하면 좋다.

 갈기산과 양산 일대는 경관이 무척 아름다워 양산팔경이란 명소가 있으며 지금은

 이 일대에 86,000평 규모의 송호국민관광지가 조성되어 여름철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바위 낭떠러지라는 의미의 영동 일대 사투리인 '덜게기'는 금강 쪽으로 수 백길의

 절벽을 이루고 있고 강 주변의 황금들녘은 한 폭의 한국화를 연상시킨다. 이곳이

 그 유명한 “양산덜게기”다. 갈기산과 소골을 사이에 두고 마주 솟아있는

월영산 아래의 금강쪽 바위절벽은 “금산덜게기”라 한다. 양산과 금산 두 '덜게기'는

 임진왜란 때 왜군을 막을 수 있는 천혜의 요새였다.

 

그러나 중봉 조헌 선생은 이곳덜게기에서 왜군을 막자는 기허당 영규대사의 제안을

 거부하고 금산벌에서 왜군과의 접전을 벌여 700의사 전원이 순국했다. 그 때 장렬하게

 순국했던 장졸들의 무덤이 현재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에 있는 ‘칠백의총’이다.

 

 갈기산 가는길 헬기장

갈기산 정상

갈기산 정상

 하산주

 노루궁댕이 버섯

월영산을 '달을 맞이하는 산'이라는 뜻으로 대보름날 이곳에 뜨는 달을 보고 풍년을 점쳤다고 한다.

월영산(月影山)

전북 장수군 수분리에서 발원한 금강은 수태극(水太極), 산태극(山太極)을 이루며 남한의

 중심부를 이루는 이곳 월영산! 

금산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명산이며, 매년 정월 대보름 날에는 이 고장 주민들의

 달맞이산으로 월영산(月迎山)이라 부르기도 하며

비틀목재를 중심으로 북쪽인 월영산쪽으로 달이 뜨면 풍년이고,

 남쪽인 성인봉쪽으로 달이 뜨면 그때는 가뭄이 심하여 흉년이 든다하여,

그해 한해의 농사를 점쳐왔으며, 월영산 중턱에 구름이 걸치면 많은 비가 내려 이 고장

 주민들은 미리 장마를 대비했던 신비한 산으로 알려져 있다는군요.

 

 월영봉 정상 표지석

 

월영산 입구에 새워진 표지석

 

 ..

선비문화 탐방길 (함양)

2013년 9월 1일

대덕 산악회 참석 인원 45명 

 

 

 

 남계서원 강당 마당에서 바라본 풍영루, 누각 2층에는 '조도문(遭道門)'
  

풍여영를 통과하면 강당 영역이 나옵니다.

정면에 강당이 있고 좌우에는 동재와 서재가 자리하고 그 앞에는 묘정비각이

있습니다.

"정여창은 김종직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으며 김굉필과 교분이 두터웠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정여창은 김종직의 제자로 사림의

한 사람이라 하여 함경도 종성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호 '일두(一)'는 정여창이 스스로를 '한 마리의 좀'이라는 뜻으로 낮추어서

부르기 위해 지었는데, 이는 정이천(程伊川, 1033∼1107, 중국 북송 때의 유학자)의

 '천지간에 한 마리 좀에 불과하다'는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 

일두 정여창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창건된 함양 남계서원(濫灆書院)

정여창 선생 묘소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고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종직이 화를 입자 이에 연루되어

 정여창은 함경도 종성으로 귀양가 유배생활 7년째되는해에 그곳에서 숨을

거둡니다.

문인과 유림들은 머나먼 그의 고향 함양까지 두 달에 걸쳐 시신을 옮겨와 장사를

 지냅니다.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 정여창의 묘는 서원뒤 승안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죽움뒤에도 또 다른 화가 가해지는데 갑자사화입니다.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 김굉필이 사사될 때 정여창은 부관참시를 당합니다.

조선시대 사림을 대표하는 그의 묘소에는 온화한 그의 성품을 반영하듯 문인석

 또한 순한 표정을 지은 채 양쪽으로 하나씩 서 있습니다.

또한 정여창 묘 앞에는 당당한 모습의 신도비가 서 있어 눈길을 끕니다.

이 신도비는 1689년 3월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려 하자 자결을 시도한 동계(桐溪) 정온(鄭蘊,)이 지은

 것입니다.

그리고 두전(頭篆) 및 비문 전체의 글씨는 이조판서를 거쳐 판돈령부사에 이른

 서곡(西谷) 이정영(李正英)이 썼습니다.

정여창 묘소 바로 위에는 부인인 정경부인(貞敬夫人) 완산이씨 묘소가 있습니다.

 부인의 묘소를 왜 위쪽에 썼는지는 알 수는 없으나 정여창의 묘소와 여러모로

 많이 닮았습니다. 

 

 

 

 

 

 

 

 

 충의공 대소헌 조종도

산청군 소남 마을은 충의공 대소헌 조종도의 후예들이 많이 살고 있다.

 대소헌은 남명 선생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함양 황석산성에서 장렬히 순절한 선비이다. 
함안 조씨 문중은 대소헌의 ‘충의정신’을 가풍으로 이어오면서 한말까지 많은 선비들이 배출돼 조상들의 업적을 계승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남명 학풍을 진작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해 왔다. 

 

 

 

 

 

 

 

 

 

 

 

 

 

부회장 사모님과  대소헌 조종도 사당 앞에서

 

45명 수젭이 떠느라 수고 많습니다.

 

 

불타기 전 농월정 모습 

 

 함양 람천정(藍川亭)

 


 경남 유형문화제 433호 거연

영귀정(詠歸亭)의 영귀는  논어 11. 선진편에 공자가 만약 누군가가 너희들을 알아

주면 어떻게 하겠냐고 묻자 (증자의 아버지)이 늦은 봄 봄 옷을 입고 어른 5,6명과 동자 6,7명을 데리고 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대에서 놀다가 노래하며 돌아오겠어요)'의 끝 구절 영이귀(詠歸)에서 따 온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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