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산행일지(121)/산행일지(118)

선비문화 탐방길 (함양)

by 석암 조헌섭. 2013. 9. 2.
반응형

..

선비문화 탐방길 (함양)

2013년 9월 1일

대덕 산악회 참석 인원 45명 

 

 

 

 남계서원 강당 마당에서 바라본 풍영루, 누각 2층에는 '조도문(遭道門)'
  

풍여영를 통과하면 강당 영역이 나옵니다.

정면에 강당이 있고 좌우에는 동재와 서재가 자리하고 그 앞에는 묘정비각이

있습니다.

일두 정여창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창건된 함양 남계서원(濫灆書院)

 

 

 

 

"정여창은 김종직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으며 김굉필과 교분이 두터웠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정여창은 김종직의 제자로 사림의

한 사람이라 하여 함경도 종성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호 '일두(一)'는 정여창이 스스로를 '한 마리의 좀'이라는 뜻으로 낮추어서

부르기 위해 지었는데, 이는 정이천(程伊川, 1033∼1107, 중국 북송 때의 유학자)의

 '천지간에 한 마리 좀에 불과하다'는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 

 

정여창 선생 묘소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고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종직이 화를 입자 이에 연루되어

 정여창은 함경도 종성으로 귀양가 유배생활 7년째되는해에 그곳에서 숨을

거둡니다.

문인과 유림들은 머나먼 그의 고향 함양까지 두 달에 걸쳐 시신을 옮겨와 장사를

 지냅니다.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 정여창의 묘는 서원뒤 승안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죽움뒤에도 또 다른 화가 가해지는데 갑자사화입니다.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 김굉필이 사사될 때 정여창은 부관참시를 당합니다.

조선시대 사림을 대표하는 그의 묘소에는 온화한 그의 성품을 반영하듯 문인석

 또한 순한 표정을 지은 채 양쪽으로 하나씩 서 있습니다.

또한 정여창 묘 앞에는 당당한 모습의 신도비가 서 있어 눈길을 끕니다.

이 신도비는 1689년 3월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려 하자 자결을 시도한 동계(桐溪) 정온(鄭蘊,)이 지은

 것입니다.

그리고 두전(頭篆) 및 비문 전체의 글씨는 이조판서를 거쳐 판돈령부사에 이른

 서곡(西谷) 이정영(李正英)이 썼습니다.

정여창 묘소 바로 위에는 부인인 정경부인(貞敬夫人) 완산이씨 묘소가 있습니다.

 부인의 묘소를 왜 위쪽에 썼는지는 알 수는 없으나 정여창의 묘소와 여러모로

 많이 닮았습니다. 

 

 

 

 

 

 

 

 

 충의공 대소헌 조종도

산청군 소남 마을은 충의공 대소헌 조종도의 후예들이 많이 살고 있다.

 대소헌은 남명 선생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함양 황석산성에서 장렬히 순절한 선비이다. 
함안 조씨 문중은 대소헌의 ‘충의정신’을 가풍으로 이어오면서 한말까지 많은 선비들이 배출돼 조상들의 업적을 계승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남명 학풍을 진작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해 왔다. 

 

 

 

 

 

 

 

 

 

 

 

 

 

부회장 사모님과  대소헌 조종도 사당 앞에서

 

45명 수젭이 떠느라 수고 많습니다.

 

 

불타기 전 농월정 모습 

 함양 람천정(藍川亭)


 경남 유형문화제 433호 거연

영귀정(詠歸亭)의 영귀는  논어 11. 선진편에 공자가 만약 누군가가 너희들을 알아

주면 어떻게 하겠냐고 묻자 (증자의 아버지)이 늦은 봄 봄 옷을 입고 어른 5,6명과 동자 6,7명을 데리고 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대에서 놀다가 노래하며 돌아오겠어요)'의 끝 구절 영이귀(詠歸)에서 따 온 말 .

 


신나는 트롯트메들리

 

 

 

반응형

'산행일지(121) > 산행일지(118)'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슬산 [琵瑟山]의 사계  (0) 2013.10.29
갈기산(585)-월영산(529) 선비문화 탐방길(함양)  (0) 2013.10.07
앞산(대구)  (0) 2013.08.25
변산반도 국립공원  (0) 2013.08.03
응봉산(울진,삼척)  (0) 2013.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