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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124)

조선 천재 이인성

by 석암 조헌섭. 2012. 7. 12.

[권근영의 그림 속 얼굴] 조선 천재 이인성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1937년 10월, 대구의 다방 ‘아르스(ARS)’에 괴한이 들이닥쳤다.

 다방 주인은 화가 이인성(1912~1950). 괴한은 벽에 걸린 그의 그림을 칼로 그었다.

 주인은 격투 끝에 칼을 빼앗아  괴한의 얼굴을 그었다. 

 

 “그자가 그림의 발을 베었기에, 나는 그자의 팔을 벨까 하였습니다”라는 게 화가의 말.

 괴한의 사정은 이랬다.

 이인성에 관한 신문기사를 모아오던 중 그해 문부성 미술전람회에 입상 소식이 없자

 더 분발하라는 뜻에서 저지른 일이라는 것.

때아닌 다방 활극은 팬심이 낳은 미담이자 목숨 걸고 그림을 지킨 화가의 결기의 상징이

 됐다. 당시 매일신보가 전한 이인성의 스타성이다.

 그래서였을까. 이인성의 최후는 웃지 못할 촌극이고, 비극이었다. “나 말요? 나?

 천하의 나를 모르오?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나를 모르오? 난 이인성이오.

 천하의 천재 이인성이오.” 통금 시간, 길을 막아선 치안대원은 어이가 없었지만 취객의

 기세가 하도 등등해 집으로 보내준다.

 

 잠시 후 고위층 인사인 줄 알았더니 고작 화가이더라며 쫓아가 총을 쏜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1월 벌어진 총기 오발 사고다.

 소설가 최인호가 ‘누가 천재를 죽였는가’를 통해 전한 이인성의 죽음이다.

 38세. 이인성은 그렇게 잊혀졌다.

 

해당화(부분), 1944, 캔버스에 유채, 228.5×146㎝.
 

 그는 공모전 스타였다. 17세 때인 1929년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입선하고,

스무 살엔 특선을 했다.

 가난했지만 재능을 아깝게 여긴 고향 대구 유지들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도 갔다.

 거기서 반 고흐, 고갱 등 후기 인상파의 화풍을 감각적으로 소화했다.

1932년 요미우리 신문엔 ‘조선의 천재 이인성’이라는 기사도 실렸다.

 없는 학맥을 벌충하듯 열심히 공모전에 출품했고, 상을 받았다. 이는 후에 ‘일본인

 심사위원들의 구미에 맞는 그림을 그렸다’는 족쇄가 됐다.

 
 그림은 ‘해당화’(1944), 선전 마지막 출품작이다. 해당화는 5~7월 피는 꽃.

 그러나 올망졸망 모인 소녀들은 추운 듯 꽁꽁 싸매고 있다.

하늘은 곧 폭우가 닥칠 듯 잔뜩 찌푸렸고, 먼 바다의 돛단배는 불안하다.

 여름꽃과 겨울옷을 한데 모은 기이한 그림. 연극적인 시대, 연극 세트장처럼

 리얼리티보다는 구성의 완결을 꾀한 걸까? 그림 재주 하나로 혼란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인성. 박제가 되어 버린 조선 천재에 대한 연민에서인지, 그림은 이렇게도 보인다.

 해당화 활짝 피어도, 내 마음은 겨울. 잊혀진 화가 이인성의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올해는 그가 태어난 지 100년이다.
                                             [중앙일보] 입력 2012.07.12

                                                       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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