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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124)

옛날 초계군 지도 조헌섭

by 석암 조헌섭. 2010.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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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굉(金宇宏)

김우굉(金宇宏, 1524∼1590)의 자는 경부(敬夫)이고, 호는 개암(開巖)이며,
본관은 의성(義城)으로 성주(星州)에 거주하였다.
그는 부사(府事)를 지낸 칠봉(七峰) 김희삼(金希參)의 이들이며,
동강 김우옹의 형이기도 하다.

그의 문집은 {개암집(開巖集)}이 있다. 급문 : 그는 초년에 아우 김우옹과 함께
부친의 명으로 남명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늦게야 퇴계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의 행장에 의하면, "일찍이 퇴도(退陶)와 남명(南冥)의 문(門)에 놀았고,
또 어진 아우가 있어 서로 절차(切磋)하여 문장이 일세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嶺南人物考)." 고 하며, 남명선생의 만시(挽詩)를 짓기도 하였다.

과거 : 28세 때(1551년, 신해) 사마시(司馬試)에 장원으로 뽑혔고, 29세 때(1552년,
임자) 식년 진사에 제1등으로 합격하였다(司馬榜目).

42세 때(1565년, 을축)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에 들어가면서부터
환로(宦路)에 나섰으며,
43세 때(1566년, 병인)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그가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서기 전인 명종 20년(을축) 8월 5일에 문정왕후가
승하하자 승려로 정사(政事)에 참여하고 있던 요승 보우(普雨)를 축출하도록
앞장서서 상소(명종실록} 20년)를 하기도 했던 김우굉은 경연에 나아가 
강(講)할 때나 사간원에서 재임 중일 때 임금에게 여러 차례 직간을 하여 미움을
사기도 하였다.

같은 해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있던 아우 김우옹이
기축옥사(己丑獄事)에 연루되어 함경도 회령(會寧)으로 유배된 관계로,
그 영향을 받아 외직으로 밀려나기도 하였다.

벼슬 : 그는 50세 때(1573년, 계유) 부수찬이 되었고, 55세 때(1578년, 무인) 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동부승지, 대사간, 대사성 등을 지냈으며,
56세 때(1579년, 기묘) 병조참의, 승지에 이르렀으나 이수(李銖)의 옥사로
곧 파직되었다.

57세 때(1580년, 경진)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형조참의, 장예원판결사,
홍문관부제학 등을 엮임하였고, 58세 때(1581년, 신사) 유생 박제(朴濟)로부터
음흉하다는 탄핵을 받아 외직으로 물러나 청송부사, 광주목사 등을 지냈다.

60세 때(1583년, 계미) 선조 16년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에 부임하였을 때에는
이이(李珥)와 사이가 나빠 서인들의 미움을 사기도 한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 성주로 돌아왔고,

66세 때(1589년, 기축) 동생 김우옹이 정여립의 옥사에 연좌되어 안동의 임지에서
회령으로 귀양가게 되었는데, 그는 영천으로 달려가 동생을 만나 갓과 옷을 벗어주고 시 한 수를 지어주며 이별하였다고 한다. 

43세 때(1566년, 병인) 5월 13일에 강익, 노관(盧), 양죽암, 김우옹 등과 남계서원에
모였다(梅村實紀). 향사 :
67세 때(1590년, 경인) 우거지 상주(尙州)에서 세상을 떠난 후 사후
속수서원(涑水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