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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128)

서포 김만중과 노수신

by 석암 조헌섭. 2011.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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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포 김만중(西浦 金萬重)1637년-1692  

 

 

구운몽  사시 남정기 의 저자 김만중은 김만중은 조선 시대 손꼽히는 작가로 알려졌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어머니 신사임당에게 엄하게 가르침을 받아 인재를 길러 낸 것처럼

서포 김만중 또한 구운몽 사시남정기 같은 수작을 남길 수 있었든 것은 어머니 윤씨 부인이

있었기에 대 작가가 될 수 있었다.

당시 명문가(名門家)인 광산김씨(光山金氏)의 가문 종신 김익겸의 아내로서 글 읽기를

무척 좋아해 구운몽을 지은 것도 어머니에게 효도를 위해  지은

것이라 한다.

효성이 지극한 만중은 유복자로 태어나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겨

어머니 한태는 정성(精誠)스런 마음으로 온갖 책을 구하여 항상 곁에서 읽어 드렸으며

 

동생 김만기 (1633-1687년) 는 벼슬이 대제학  판서에 이르렀다.

 

 

 

소제 노수신 (蘇齋 盧守愼) 1515-1590 년

 조선 명종 선조 때의 문신 光州人 1545년 (인종1년)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이 되어

이기(李起)를 파면시키고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尹元衡) 이기(李起) 등이 일어킨

 을사사화(乙巳士禍)로 파면당했다.

이듬해 1546년 순천에 유배되었다가 그해 벽서(壁書)의  변이 일어나자  죄가 더해져서

 19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다가 1656년에 괴산으로 다시 옮겼다.

선조가 즉위한 후 1569년에 누명이 벗겨져서 홍문관 직제학이 되고 이어 부제학 이조 판서겸

 대제학을 거쳐 이듬해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에올랐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이 난 을 이르켜려다  발각되자  크게 옥사가 일어나 정여립 일당이

김우옹을 천거했다는 죄로 유배설까지 있었으나 왕명으로 파직되는 것으로 그쳤다.

문장과 서예가 능하였고 양명학을 연구하여 주자학의 공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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