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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124)

신암 이준민(新庵 李俊民)

by 석암 조헌섭. 2011. 12. 17.

신암 이준민(新庵 李俊民)
  
 이준민(李俊民, 1524∼1590)의 자는 자수(子修)이고, 호는 신암(新庵)이며,
본관은 전의(全義)로 시(諡)는 효익(孝翼)이다. 
그는 1524년에 아버지 공량(公亮)과 어머니 창녕 조씨 언형(彦亨)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남명선생은 이공량에 대해 '우리 자형은 평소 별난 행실을 좋아하지 않고 입으로
일찍이 남의 나쁜 점을 말한 적이 없으며, 마음으로 남을 해치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남을 사랑하고 착한 것을 좋아하며 소탈하고 얽매이지 않아 고인(高人)의 풍모가
있었다.'고 하여 그의 됨됨이를 칭찬하기도 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명선생의
문하에 출입하였고, 남명선생은 이공량의 재실 기문인 영모재기(永慕齋記)를
지었으며, 신암에게 준 시(詩)도 있다.

 26세 때(1549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33세 때(1556년) 황해도사로 벼슬을 옮겨 문신들이 보는 과거인 중시(重試)에     
급제하였다. 
성균관,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등에서 벼슬을 두루 하였다.

32세 때(1555년) 사간원 정언(正言)에 제수되었다.
    정언은 정6품 벼슬로 조정의 잘못된 점을 임금께 아뢰는 일을 맡아보는 자리였다.     
    이 때 홍문관 부제학 이량(1519∼1563)이 권세를 믿고 조정을 어지럽히자
    신암(新庵)은 정언의 직분을 다하고자 이를 탄핵하였다.

이량은 효령대군의 5대손으로 명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세력을 키워 이로써 축재에
 힘을 쏟아 그의 집 앞이 항상 시장과 같았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윤원형, 심통원 등과 '삼흉(三凶)'이라고 불렀다. 
이 일로 인해 이량의 무리들에게 미움을 사 영변판관(寧邊判官)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그는 진주에서 태어났지만, 문과급제 후 벼슬을 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사를 하였다. 이렇게 하여 신암의 후손들은 고향인 진주 금산을 떠나 서울에
살게 되었다. 하지만 벼슬살이를 하면서도 고향에 있는 부모를 뵈러 진주에 자주
내려왔다.


35세 때(1558년) 부모를 뵙기 위해 진주로 오다가 우연히 두류산 유람을 떠나는
    외숙 남명선생을 만나기도 하였다.
    이 때의 상황을 남명선생이 상세히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저녁 무렵 진주에서 묵었다. 일찍이 홍지(진주목사 김홍)와 약속하여 사천에서
배를 타고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 쌍계사로 들어가기로 계획을 세웠다. 
말고개에서 뜻하지 않게 종사관 이준민을 만났다. 

호남 땅에서 아버지를 뵈러 오는 참이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인숙이었다."

두류산 유람을 떠나는 남명과 생질 이준민은 말고개에서 만났다. 
말고개는 진주시 옥봉북동과 초전동을 연결하는 고개인데 지금 '말티'고개로
불리고 있다. 

남명과 이준민은 말티고개에서 만나 같이 집으로 향하였다. 
신암은 남명과 같이 고향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 다음날 신암은 소를 잡고 주악을 베풀어 마음껏 술을 마시고 파하였다고 한다. 

52세 때(1575년)부터 조정의 논의가 양분되어 동인과 서인으로 당파가
    생기게 되었다. 신암은 당파에 개의치 않고 불편부당한 처신으로 붕당의 일을
    일절 입에 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당파의 일을 물으면, '조정의 일을 사사로운
    데서 이야기할 수 없다'면서 질책을 하였다. 

65세 때(1588년) 신암의 어머니 창녕 조씨가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90세를 넘긴
    나이였다. 어머니 생전에 신암 역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인 데도 어머니를
    모시는  정성은 지극하였다. 

이준민이 서울에 살 때, 송강 정철과 이웃하여 살았다.
이 때 송강이 매일 새벽 발자국 소리를 듣고 일어나 앉아 말하기를,
'이판서(이준민)가 어머니 방에 문안드리러 가는구나'라고 하였다 한다.

68세(1591년) 이준민은 어머니 상을 당하자 더운 여름인 데도 빈소를 잠시도
    떠나지 않고 지켰다. 이로 인해 병이 깊어져 세상을 떠났다. 양주 고령산에
    장사지냈다. 얼마 후 나라에서는 효익(孝翼)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1702년(숙종 29년) 이준민의 고향 사람들이 그를 비롯하여 이 지역 출신인
강응태, 성여신, 하징, 한몽삼을 모시기 위해 임천서원을 건립하여
1719년에 위패를 봉안하였다. 그 후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훼철되었다가
다시 복원하여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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