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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128)

약포 정탁(藥圃 鄭琢)

by 석암 조헌섭. 2011.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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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포 정탁(藥圃 鄭琢)

정탁(鄭琢, 1526∼1605)의 자는 자정(子精)이고, 호는 약포(藥圃)이며
시호(諡號)는 정간(貞簡)이며,
본관은 서원(西原)으로 예천(醴泉)에 거주하였다.

그는 현감 원로(元老)의 증손으로, 이충(以忠)의 둘째아들이며,
퇴계선생의 문인이기도 하다. 그의 문집 및 저술은 약포집(藥圃集)과
용만문견록(龍灣聞見錄) 등이 있다. 

13세 때(1538년) 백담 구봉령과 더불어 금사사(金沙寺)에서 독서하였고,
    병석에서 기삼백기삭치윤법(朞三百氣朔置閏法)을 스스로
   고험(考驗)했다 하니 그 영민조성(穎敏早成)했음을 가히 알 수 있다.

17세 때(1544년) 퇴계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심학지요(心學之要)와
    천실지공(踐實之功)에 대해서 공부하였다.
28세 때(1553년) 소수서원에서 글을 읽었다. 

36세 때(1561년) 남명선생을 찾아 뵙고 수업하였는데,
    돌아갈 적에 선생께서     "소를 한 마리 주니 타고 가라"고 하였다. 
    그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선생께서 " 그대는
    말이 매우 민첩하니 천천히 멀리 이르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선생께서 소명을 받아 상경했을 때 한강까지 마중을 나와 영접하여
     제자로서의 도리를 다하였다. 

27세 때(1552년) 봄에 성균관(成均館) 생원시(生員試; 식년 생원 3등)에
    합격하였고, 
33세 때(1558년) 식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32세 때(1557년) 여름에 {계몽} 한 질을 조목(趙穆)에게 주었다.
35세 때(1560년, 경신) 성여신에게 {상서}를 주고 이름있는 선생에게
     나아가  배울 것을 권유하였다. 

40세 때(1565년) 가을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올랐으며,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탁배(擢拜)되었고, 오건과 만났다.

41세 때(1566년, 병인) 10월 4일에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고,

44세 때(1569년) 5월 21일에 진주 유생(晉州儒生)의 옥사를 아뢰었다.
46세 때(1571년) 4월 11일에 지평에 제수되었고 
48세 때(1573년) 8월 26일에 이조좌랑(吏曹佐郞)에 제수되었으며

56세 때(1581년) 2월 12일에 대사헌에 제수되어 4월 1일에 이조참판에 
    제수 되었다. 

67세 때(1592년, 임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장 먼저 서쪽으로 임금의 
    행차를 옮길 것과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할 것을 주장하였다.


80세 때(1605년) 9월 19일에 풍천 고평리 집에서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실록의 기사에 의하면, 서원 부원군 정탁의 졸기에"
   서원 부원군(西原府院君) 정탁(鄭琢)이 졸하였다. 

정탁은 인품이 유순하고 온후한 사람인데, 등과했을 당시에는 명망이 없어
오랫동안 교서관(校書館)에 머물러 있었다.
일찍이 향실(香室)에 직숙(直宿)하던 날 문정왕후(文定王后)가 향(香)을
가져다가 불공을 드리려고 하자,
정탁이 불가한 일이라고 고집하면서 끝내 향을 올리지 않았다.  

이로 인해 당세에 중시되고 이어 현로(顯路)에 통하게 되었으며,
뒤에 호성공(扈聖功)으로 숭품(崇品)에 오르고 얼마 후에 재상으로 
발탁 되었다.
이에 상소하여 물러가기를 청하였으니 고인들의 치사(致仕)하던 기풍이
있었다.

작위를 탐하여 늙어도 물러가지 않는 자에 비하면 차이가 크다. 고 하였다. 
1635년(을해) 8월 1일에 고상(故相) 정탁(鄭琢)에게 문간(文簡)이란 시호를
내렸다. 

"정탁은 사람됨이 공검(恭儉)하고 질직(質直)한데,
초야에서 일어나 재상의 지위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영의정이 추증되었고, 예천의 정도서원(正道書院)에
배향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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