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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124)

“입재 노흠 (立齋 盧欽)

by 석암 조헌섭. 2018. 10. 27.
“입 노흠 (立齋 盧欽1527∼1602)”

노흠(盧欽, )의 자는 공신(公信)이고, 호는 입재(立齋)이며, 본관은 광주(光州)로
삼가(三嘉)에 거주하였다.
그는 1527년 아버지 수민(秀民)과 어머니 일직 손씨(一直孫氏) 생원 세기(世紀)의
딸 사이에 태어났다. 그의 문집은 {입재집(立齋集)}이 있다.

19세 때(1545년) 남명선생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 
37세 때(1563년) 김우옹, 정구(鄭逑), 박성(朴惺), 노흠, 김면, 배신,
    이기춘(李起春) 등의 제현들과 더불어 도의(道義)로 교유하였다. 

38세 때(1564년) 생원시(식년 생원 3등)에 합격을 하였다. 
    벼슬 : 성균관에서 추천하여 참봉의 벼슬을 내렸으나 받지 않았으며,
뒤이어 봉사(奉事)의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수행에 전념하였다. 
그는 남명선생 45세 때 노흠이 찾아와서 배웠으며, 남명선생이 일찍이 노흠에게
이르기를 '경(敬)'과 '의(義)'를 배워 궁구하면 도를 들을 날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60세 때(1586년) 가을에 전치원 등과 황계폭포(黃溪瀑布)에서 유람하였는데,

    이 때 이흘(李屹)이 따라와 시(詩)를 남겼다.
    실록의 기사에 의하면, 6월 28일에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이

    의병이 일어난 일과 경상도 지역의 전투상황을 보고하는 글에서
    본도(本道)가 함락되어 패전한 뒤에 무너져 사방으로 흩어진 자들이 도망한
 
군사나 패전한 병졸만이 산 속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대소 인원들이 모두 산 속으로 들어가 새나 짐승처럼 숨어 있으니 아무리
되풀이해서 알아 듣도록 설득해도 응모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근일에는 고령(高靈)에 사는 전 좌랑(佐郞) 김면(金沔), 합천(陜川)에 사는
전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이 그의 동지인 현풍(玄風)에 사는 전 군수(郡守)
곽율, 전 좌랑 박성(朴惺), 유학(幼學) 권양(權瀁) 등과 더불어 향병(鄕兵)을
모집하니 따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인홍은 정예병(精銳兵)이 거의 수백 명이며 창군(槍軍)은 수천 명이나 되는데
고을의 가장(假將) 손인갑(孫仁甲)을 추대하여 장수로 삼아 왜적을 방어할
계책울 세우고 있고, 삼가(三嘉)에 사는 훈련 봉사(訓鍊奉事) 윤탁(尹鐸),
전 봉사(奉事) 노흠(盧欽)도 의병(義兵)을 일으켜 서로 응원하려고 합니다.

김면은 스스로 장수가 되어 바야흐로 병사들을 모집하는데,
적병들이 갑자기 쳐들어오자 병사들을 거느리고 나가 싸우니 왜적들이
패전하여 달아나므로 10여 리를 추격하여 거의 대첩(大捷)을 거두려는 찰나에
복병(伏兵)이 갑자기 나타나니 우리 군사가 놀라 무너져 퇴각했다고 하였다. 

6월 29일에 비변사가 의병을 모아 싸운 정인홍·김면·박성·곽재우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자고 청하는 글에 "전 장령 정인홍(鄭仁弘), 전 좌랑 김면(金沔)·
박성(朴惺), 전 참봉 노흠(盧欽), 유학(幼學) 곽재우(郭再祐)·전우(全雨)·
이대기(李大期) 등이 변란을 듣고 소매를 걷어붙이고 일어나 모의하여
의병(義兵)을 모아 기어이 왜적의 무리들을 섬멸하기로 작정하였으니,

그들이 뜻이 지극히 가상합니다. 모두 서용하여 후래를 권장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또한 7월 22일에 선조(宣祖)는 의주에서 경상도 백성들에게 글을 내리기를,
"부덕한 내가 임금이 되어 백성들을 보호하지 못하고, 왜적을 방어하지 못하여
서울을 떠나 서쪽 의주에 머문 지가 이미 한 달이 지났다. 

 경상도는 인심이 믿음이 있고 두터워 충신과 열사가 많다.
많은 선비들이 서로 분발하면 반드시 국토를 왜적의 손에서 회복시킬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정인홍, 김면, 이로, 박성(朴惺), 곽율, 조종도,  노흠, 곽재우, 권양(權瀁), 이대기,
전우(全雨) 등이 의병을 일으켜 많은 군사들을 모집했다 하니 나는 경상도 선비들의
충의를 믿으며 라고 하였다.

66세 때(1592년, 임진) 4월에 임진왜란이 크게 일어나자 권양(權瀁) 등과 삼가에서
의병을 일으켜 곽재우의 진중에서 군량미 운송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왜적이 온 강토를 유린하고 임금은 서울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신하였다.

76세 때(1602년, 임인) 세상을 떠난 후 고암서원(高巖書院)에 배향되었으나
오늘날 서원은 없어지고 상량문(上樑文)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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