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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128)

(허난설헌許蘭雪軒)초희의 슬픔

by 석암 조헌섭. 2014.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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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許蘭雪軒)초희의 슬픔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

 

초희는 허난설헌(許蘭雪軒)의 본명이다.

조선조 규방문학의 대가이며 한 평생을 외로움으로 살다간 비운의 여인이다.

초희는 아버지 허엽의 여식으로서 큰 오빠 허성, 허봉,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과 함께 오 문장가 라고 불리는 가문의 유학자인데 허균은 오십이 못된 나이에 오우분시로 사지가 찢겨 죽임을 당하는 불운의

혁명아였다.

 

아버지 허엽(초당)은 강릉에 살면서 바닷물을 간수로 사용 두부 만드는 방법을

개발하여 지금도 강릉에 가면 초당 두부가 유명하다.

 

그녀는 초당 허엽의 딸이며 허균의 누이이다.

8세에 상량문을 지어 신동으로 일컬었으며 손곡 이달로부터 수학한다.

15세 되던 해 안동김씨 가문의 김성립(金誠立, 1562년~1592년)과 결혼하게 된다.

 

초희의 비극은 여기서 부터 시작된다.

만나지 말아야 할 인연이었던 것이다.

남편 김성립은 그리 뛰어나지 못했으며 재주와 학식이 난설헌에 견줄 바가

아니었다.

 

재주와 용모가 빼어난 난설헌의 배필감으로 너무나 부족한 위인이었다.

잘난 아내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신혼 초부터 공부한답시고 기방출입만 하면서 가정은 등하시한

졸장부가 되었는지 모른다.

 

남편이 주색에 빠져있을 때 난설헌의 외로움은 구구절절이 한서린 시가로

표현되었다.

옛날에는 선비들이 모여서 글 공부 하던곳을 접(接)이라 했다.

김성립(金誠立)이 접에가서 공부는 하지않고 계집질만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난설헌은 짤막한 5언시를 지어본다.

 

고지접유재(古之接有才)--옛접에는 재가 있더니

금지접무재(今之接無才)--요즘 접에는 재가 없더라.

 

이는 옛날의 접에는 재(才)방변이 있었지만 -------접(接)

요즘에는 재(才)방변이 없어져 첩(妾)만 남았구나.--첩(妾)

 

이 얼마나 절묘한 풍자인가!

이토록 뛰어난 재주를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 어찌하여 이 넓은 세상에서

삼종지도[三從之道]로 옴짝달싹도 못하는 조선 여자로 태어나서 하필이면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을까?

 

사랑을 잃고 헤매는 버림받고 의지할 데 없는 그녀는 삶의 의욕을 잃고

시(詩) 쓰기기로 고뇌를 달래며 규원에 같혀 하늘만 올려다보는 슬픈

여인이 되었다.

각박한 시댁과 시어머니와의 갈등의 연속, 숫한 권유에도 아랑곳 않는

남편의 방탕한 생활 여성으로서의 차별받는 조선사회의 온갖 부조리와

당쟁에 의한 친가의 몰락,

오라버니의 불행한 죽음 (광해군으로부터 능지처참을 당함), 자기가 낳은 자식들의 죽음 등 절대적인 시련 앞에 27세의 나이로 한스런 이승을 떠나게 된다.

 

다음은 딸과 아들을 잃은 뒤 그 고통을 읊은 시다.

‘곡자(哭子)’

거년상애녀(去年喪愛女) : 지난해에는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금년상애자(今年喪愛子) :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


애애광릉토(哀哀廣陵土) : 슬프고 슬픈 광릉 땅에
쌍분상대기(雙墳相對起) : 두 무덤이 서로 마주 보고 서 있구나.


소소백양풍(蕭蕭白楊風) : 하얀 버드나무 가지에 바람은 쓸쓸히 불고
귀화명송추(鬼火明松楸) : 도깨비불은 솔, 오동나무 숲에서 반짝인다.

 

지전초여백(紙錢招汝魄) : 지전으로 너의 혼을 부르며
현주존여구(玄酒尊汝丘) : 검은 술을 받들어 너의 무덤에 붓는다.


응지제형혼(應知弟兄魂) : 남매의 혼은 서로 알아보고
야야상추유(夜夜相追遊) : 밤마다 서로 좇으며 노닐 거야.


종유복중해(縱有腹中孩) : 비록 뱃속에 어린아이가 있다지만
안가기장성(安可冀長成) : 어찌 편안히 장성하길 바라겠느냐.


낭음황대사(浪吟黃臺詞) : 황대사를 읊으며 흐느끼노라
혈읍비탄성(血泣悲呑聲) : 피눈물 슬픈 소리를 삼키노라


병약한 어미를 닮은 아이들은 일찍 요절했으니 허난설헌(許蘭雪軒)의

팔자도 참으로 기구하다.

게다가 배속에 있던 아이까지 죽었다고 하니 아마도 이러한 일 때문에 건강이

악화되어 일찍 죽은 것 같다. 남편도 무심하지, 의지가 되었던 아이들은 매일

골골거리다 황천을 건넜지. 무슨 살 낙이 있었을까?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허난설헌 묘 (경기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 경기기념물 제90호)

 

그러나 그녀의 향은 살아서…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향을 갖고파서 자신의 호를 스스로 난설헌(蘭雪軒)

이라고 지었다.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그 현실을 현실에 대한 생각을 선계에 투영한

그것은 절망과 슬픔 때문 이었을까?

 

아릿다운 연꽃 스물일곱송이 분홍꽃은 떨어지고…

죽기 전 그녀가 남긴 시 귀절에서 애상적인 시선의 고뇌를 본다.

 

15세기 중반으로부터 들려오는 이 통신은 신록의 계절 고은 밤 또다른

고뇌가 된다.

2014년 5월 15일 - 조 헌섭-

허난설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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