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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128)

조선시대[朝鮮時代] 회니논쟁(懷尼論爭)

by 석암 조헌섭. 2014.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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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朝鮮時代] 회니논쟁(懷尼論爭)

 

우리나라 당쟁의 역사[歷史]는 그 뿌리가 깊다.

좁은 땅덩이 안에서 사문의 논쟁[論爭]으로 날이 지고 날이 새는 지경이었다.

예송 논쟁[禮訟 論爭]을 앞세운 전형적인 권력 투쟁[鬪爭]이었다.

그 중에서 붕당정치[朋黨政治]의 주요한 분기점은 희니논쟁(懷尼論爭)이었다.

 

조선조 서인의 영수 송시열[宋時烈] 과 그의 제자 윤증[尹拯] 사이에 벌어진

사상적 갈등을 말한다.

조선 후기 사색당파[四色黨派]로 분열된 두 학자의 감정적 대립이다.

 

조선시대 정치는 200년 동안 여당을 했던 노론[老論],

만년 야당이었던 남인[南人], 그 중간에 소론[小論] 3당 구조였다.

노론이 장기집권을 하니까 야당인 영남 남인[南人]은 재야세력으로

벼슬을 하기 어려웠다. 

 

조선 초기 붕당사에서 정철[鄭澈], 율곡[栗谷] , 성혼(成混)문하의 제자들로

형성된 기호학파(경기,호서지방)를 나중에 서인이라 했고,

퇴계[退溪], 남명], 화담[潭]문하의 제자들로 구성된 영남학파를

나중에 동인[東人]이라 했는데, 동인은 정여립[鄭汝立]사건이후

남명[南冥]계열의 북인, 퇴계[退溪]계열의 남인으로 갈라진다.

 

북인은 선조 말-광해군 때 잠깐 정치계에 나오다가, 인조반정[]

으로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고, 잔존세력은 남인에 합세한다.

 

이에 정국은 남인과 서인으로 양분되고 남인은 왕권중심주의,

정권 다툼을 벌인다.

 

서인은 주자학[朱子學]외엔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학문경향이고,

남인은 시원유학(천주사상)을 중시하며 주자학을 융통성 있게 해석

연구하는 학풍[學風]이었다.

 

서인이 천주교[天主敎] 탄압에 앞장서고, 남인 윤휴의 자율적 유학경전

해석을 사문의 난적이라 매도한 것은 서인들이 절대적 주자학의

신봉자이며 중화 사대주의자[事大主義者]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약용[丁若鏞]의 '천주는 상제이다'의 사상은 남인의 최수운

선생의 동학에서 신앙사상으로 이어진다.

 

남인과 소론은 정치적 야당인데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는 민족사상가,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들을 많이 배출한다.

서인은 정치적 여당으로서 조선말 세도정치[勢道政治]의 본거지로서

일제강점기에는 대부분 친일파[親日派]로 변신한다.

 

기호학파[畿湖學派]-서인-노론은 조선의 문화중흥을 이끈 주역이면서

조선[朝鮮]을 망친 주역[主役]이기도 하다.

 

노론[老論]의 송시열[宋時烈]과 소론[小論]의 윤증[尹拯]과의 논쟁의

과정을 보면, 1683년 숙종 9년 서인이 젊은 소장층인 소론과

원로 노장층인 노론으로 분열된다.

그 중심인물은 송시열(老論)과 그이 제자 윤증(小論)이었다.

윤증[尹拯]의 부친인 윤선거[尹宣擧]와 송시열[宋時烈]은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동문수학[同門修學]한 사이였다.

 

이 두 사람이 같은 서인이면서 대립갈등을 하게 된 경위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피난 갔던 윤선거의 가족은 강화도가 청나라 군대에 의해

함락되면서 수난을 맞는데, 청군이 밀려오자 윤선거의 아내는 겁탈을

피해 자결하고 윤선거[尹宣擧]는 평민으로 변장 후 혼자서 살아나왔다.

 

윤선거[尹宣擧]는늙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서였지만 온 나라가 척화를

외치며 청군에 항전하였는데 혼자 성문을 빠져나온 것은 명분을 중시하는

사대부[士大夫] 사회에서 큰 오점[汚點]을 남겼다.

 

이로써 윤선거는 벼슬길을 나서지 않고 은둔생활을 하면서 송시열과

대립각을 세우던 윤휴[尹鑴]와 깊은 친분을 맺는다.

 

윤휴는 주자학의 원칙만을 고집하던 송시열과 사상적으로 대립하면서

원시유학(주자학이 아닌 시원경전)의 중요성을 역설한 인물이었다.

 

이런 윤휴가 못마땅한 송시열은 윤휴를 '사악한 문장으로 유가 성인들의

정신을 어지럽히는 도적놈(사문의 난적)'이라고 몰아붙여 죽게 만들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윤선거는 송시열과 나쁜 감정을 안은 채 사망했다.

이게 그 아들 윤증은 스승인 송시열에게 아버지 윤선거의

묘갈명[墓碣銘]을 부탁했다.

 

보통 묘갈명은 죽은 이의 장점과 업적 등 생전의 행적을 좋게 지어주는데,

송시열은 술이부작[]이라, 좋게 지어 말하지 않고 남들이

말하는 내용 그대로를 성의 없이 써 주었다.

 

보통 묘갈명은 죽은 이의 장점과 업적 등 생전의 행적을 좋게 지어주는데,

송시열은 술이부작[]이라, 좋게 지어 말하지 않고 남들이

말하는 내용 그대로를 성의 없이 써 주었다.

 

이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윤선거의 행적과 윤휴[尹鑴]와의 교분이

여전히 송시열의 감정의 응어리로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친에 대한 불만족스런 묘갈명을 받은 윤증은 3년간 여러 차례 걸쳐

묘갈명의 내용을 고쳐줄 것을 부탁했으나 송시열은 성의가 없었다.

또한 그의 문집에서 강화도 사건에 대해 윤선거를 험하게 몰아붙였다.

 

"수치를 모르고서 말꼴을 먹고는 뻔뻔스럽게 다시 와서 호탕하게 노는구나,

청류를 향해 옷소매를 빨지 마소, 때 묻은 옷소매에 청류 더럽힐까 두렵소"

 

이 글을 읽은 윤증은 송시열을 스승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그 둘의 관계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서로에 대한 불신과 비판만이 따를 뿐이었다.

 

당시 송시열은 회덕(대전)에, 윤증은 니산(논산)에 살고 있어서 이 사건을

'회니논쟁'이라 하였다.

이 회니논쟁을 계기로 윤증을 지지하는 소장파 학자들과,

송시열을 지지하는 원로 노장파 학자들이 서로 갈라서게 되었다.

 

1683년 마침내 송시열을 영수로 하는 노론과 윤증을 영수로 하는

소론으로 서인의 당파가 분열되었다.

이후 숙종[肅宗]이후 왕위 계승 문제로 노, 소론이 얽히면서 예전의

붕당보다 훨씬 격렬한 정치투쟁[政治鬪爭]을 하게 된다.

 

영조[英祖]와 노론, 사도세자[思悼世子]와 소론으로 뭉쳐진 붕당의

힘겨루기 등 서인의 장기집권 중 노론[老論]의 시대가 도래한다.

 

남인은 대부분 이퇴계의 제자 문인이며 영남학파의 전통계승자들이며

류성룡[柳成龍], 허목[許穆], 이익[李瀷]. 정약용[丁若鏞] 등

중농주의[重農主義] 실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서인은 박순[朴淳], 정철[鄭澈], 송익필[宋翼弼], 윤두수[尹斗壽],

최명길[崔鳴吉], 김장생[金長生], 송시열[宋時烈] 등이 있으며

노론 가문에서 김옥균[金玉均], 김좌진[金佐鎭], 김구[] 선생 등이

배출되었다.

 

또한, 노론 대부분이 일제 때에 이완용[], 송병준[宋秉畯]

을사오적[]기득권자들은 친일파 귀족으로 변신하여

영화를 누렸다.

 

아무튼, 정치적 입장에 따라 끊임없이 줄을 서야 했고, 권력의 부침에 따라

권세와 목숨을 맞바꿔야 했던 조선 후기의 이른바 '환국의 시대, 도

여기서 비롯됐다.

 

정조[正祖]의 급서 직후 세도가문을 중심으로 한 노론이 득세할 때까지

이 두 세력의 갈등을 곧 조선왕조[朝鮮王朝] 지배계층의 역사였다.

 

붕당정치의 시초가 된 이 회니논쟁(懷尼論爭)의 중심인물이 된 두 사람의

견해차는 극과 극이지만, 그들의 삶을 더듬어볼 수 있는 자취는 채

100리도 안 되는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송시열이 말년에 내려와 후진을 양성했던 '남간정사'와

온갖 벼슬을 물리치고 낙향해 머물렀던 백의정승 윤증의 고향 집,

'명재고택'이 아주 가까이 있다.

 

성리학[性理學]이 생활규범으로서 서슬 퍼렇던 시절,

완고한 원칙주의자였던 송시열과 변화된 국제 정세에 유연하게 대처하고자

했던 현실주의자 윤증은 어쩌면 스승가 제자로서 만나서는 안 될

인연이었는지도 모른다.

 

2014년 9월 20일

昔暗 조헌섭

신유 - 일소일소 일노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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