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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128)

망우당((忘憂堂) 郭再祐(곽재우) 1552∼1617년

by 석암 조헌섭. 201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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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1552∼1617년 

 

                                      곽재우 장군 영정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의병장 (1552∼1617)이 1552년 8월 28일
  경남 의령에서 태어났다. 호는 망우당, 시호는 충익이다.
1585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글귀가
  왕의 뜻에 거슬려 합격이 취소되자 과거를 포기하고 낙향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재를 털어 의병을 일으켜 의령 창녕 영산
  등지에서 크게 활약했다.
  항상 붉은 옷을 입고 전투에 나서 ‘홍의장군’이라고 불렸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경상좌도방어사로 임명되어 창녕 화왕산성
   등에서 왜군을 물리쳤다.
   곽재우 장군은 문무를 겸비해 성리학 천문 지리 의학 등 여러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필체가 활달하고 시문에도 능했으며 저서로 ‘망우당집’이 있다.


-곽재우 장군이 실제 사용한 장검-

업적-
■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 본관은 현풍(玄風).
■ 자는 계수(季綬), 호는 망우당(忘憂堂).
   경상남도 의령출신으로, 황해도관찰사 곽월(郭越)의 아들이고,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외손서이며,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과는 동서  
   사이이다.
 
1585년(선조 18년) 34세의 나이로 별시(別試)의 정시(庭試) 2등으로
   뽑혔으나, 지은 글이 왕의 뜻에 거슬려서 발표한 지 수일 만에
   전방(全榜)을 파하여 무효가 되었다.
   그 뒤, 과거에 나아갈 뜻을 포기하고 남강(南江)과 낙동강의 합류지점인
   기강(岐江)위 돈지(遯池)에 강사(江舍)를 짓고
   평생을 은거할 결심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머문 지 3년 만인
1592년 4월 14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관군이 대패하자,
   같은 달 22일에 의병을 일으켜 관군을 대신해서 싸웠다.
 
   그 공으로 같은해 7월에 유곡찰방(幽谷察訪)을 시작으로 바로 형조정랑에
   제수되었고,10월에는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승진하여 조방장(助防將)을
   겸하고, 이듬해 12월 성주목사에 임명되어 삼가(三嘉)의
   악견산성(岳堅山城) 등 성지(城池) 수축에 열중하다가
1595년 진주목사로 전근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현풍 가태(嘉泰)로 돌아왔다.
 
1597년 명나라와 일본간에 진행되던 강화회담이 결렬되고 일본의 재침이
   뚜렷해지자,
   조정의 부름을 받고 다시 벼슬에 나아가 경상좌도방어사로 현풍의
   석문산성(石門山城)을 신축하였으나,
   그 역(役)을 마치기도 전에 왜군이 침입하여 8월에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옮겨 성을 수비하였다.
   그뒤 계모 허씨가 사망하자 성을 나와 장의를 마친 뒤, 벼슬을 버리고
   울진으로 가서 상을 입었다.
 
1599년 다시 경상우도방어사에 임명되었으나 상중임을 구실로 나아가지
   아니하였고,그해 9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으나 10월에
   이르러서야부임하였고,
   이듬해 봄에 병을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자,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영암(靈巖)으로 귀양갔다가 2년 만에 풀려났다.
   그뒤 현풍 비슬산(琵瑟山)에 들어가 곡식을 금하고 솔잎으로 끼니를
   이어가다가,
   영산현(靈山縣) 남쪽 창암진(滄巖津:솥바위나루)에 강사를 짓고
   망우정(忘憂亭)이라는 현판을 걸고 여생을 보낼 설계를 세웠다.
   그러나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거절할 수 없어
 
1604년(선조 37) 찰리사(察理使)가 되었고,
   이어 선산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찰리사라는 벼슬마저
   사퇴하였다.
   곧, 안동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고, 그해 10월
   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龍衛副護軍)에 제수되고,
   다음 달 가선대부용양위상호군(嘉善大夫龍衛上護軍)에 승진하였다.
   그 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한성부우윤을 역임하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다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용양위부호군을
   거쳐 이듬해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10년 광해군의 간청으로 서울에 올라가 호분위(虎賁衛)의 부호군,
   호분위의 대호군(大護軍) 겸 오위도총부의 부총관(副摠管)에 제수되었고,
   이어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자 바로 함경도관찰사로
   바꾸어 발령하였다.
 
1612년(광해군 4)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칭탁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듬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신구(伸救)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낙향하였다.
1616년 창암강사에서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제수받았으나 역시
   나아가지 아니하고, 이듬해 죽었다.
   그는 의병활동 초기에는 의령의 정암진(鼎巖津)과 세간리(世干里)에
   지휘본부를 설치하고 의령을 고수하는 한편,
   이웃 고을인 현풍·창녕·영산·진주까지를 그의 작전지역으로 삼고
   유사시에 대처하였다.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하여 적군과 아군의
   장졸에게 위엄을 보이고, 단기(單騎)로 적진에 돌진하거나 의병(疑兵)을
   구사하여 위장전술을 펴서 적을 직접 공격하거나,
   유인하여 매복병으로 하여금 급습을 가한다든가, 유격전을 펴서 적을
   섬멸하는 전법을 구사하였다.
   수십인으로 출발한 의병은 2천인에 이르는 큰 병력을 휘하에 가질 수
   있었으며, 그 병력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2년 5월 하순경 함안군을 완전 점령하고 정암진 도하작전을 전개한
   왜병을 맞아 싸워 대승을 거둠으로써,
   경상우도를 보존하여 농민들로 하여금 평상시와 다름없이 경작할 수
   있게 하였고,
   그들의 진로를 차단하여 왜군이 계획한 호남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또한, 기강을 중심으로 군수물자와 병력을 운반하는 적선척을 기습하여
   적의 통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현풍·창녕·영산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하여 물리치고,그해 10월에 있었던 김시민(金時敏)의 1차 진주성
   싸움에는 휘하의 의병을 보내서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하기도 하였다.
 
   정유재란 때는 밀양·영산·창녕·현풍 등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화왕산성을 고수하여 적의 접근을 막기도 하였다.
   그는 또 필체가 웅건, 활달했고 시문에도 능했다.
   곽재우의 묘지는 경상북도 달성군 구지면 신당동에 있다.
   죽은 뒤에 그의 사우(祠宇) 에 ‘예연서원(禮淵書院)’이라는 사액이내려졌고,
1709년(숙종 35)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가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망우당집》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경남 창녕군 도천면. 망우정은 곽재우가 만년을 보낸 곳이다

의령군 유적지

의병탑

충익사 홍살문   

 

 

 충의문

 

백일홍 

 충의각

충익사

충현정   

의병 박물관.

곽재우 유물 일괄 문화재 사진

 보물 제671호=망우당 유물

홍의장군 동에번쩍 서에번쩍

충익사 구름다리

곽재우 장군 연보


홍의장군 곽재우는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 감사 의령 현감 등이 모두 도망가고 없자 천강 홍의장군이란 깃발을

 들고 백마를 타고 국내 최초 1592년 5월 4일 의병 10명으로 시작 기강 나루

적선을 40여 척을 빼앗았고 왜놈의 조총을 활과 칼로 대적하여 적을 모두

 섬멸하여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는 곽재우란 명성이나 10명의 부하에게

똑같은 붉은 옷을 입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왜놈을 교란시켜 왜놈 장수는

 왜군 300명 이하는 곽재우와 대적을 못하게 하였다.

또한, 야간 전투에는 나뭇가지 여러 가지에 횃불을 써 군사가 많이 보이게

 하였다.

 

그 해 6월 1일 선조수정실록에 기록 되었다.

 의병을 규합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데 큰 공을 새워

매년 6월 1일을 의병의 날(곽재우의 날)로 지정하여

 의령군에서는 큰 줄 당기기와 의령 둔치에서 기네스에 등재된 세계적

문화유산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관광객과 군민이 함께하는 대동놀이

 한마당 축제로 운영된다.
이와 함께 K-뮤지컬 의병장 곽재우와 의병문화학교, KBS 전국노래자랑,

 소망풍등 날리기, 어린이 상상놀이체험, 의병기획공연, 전통예술 공연,

향토문화 공연 등 다채로운 행사가 열린다.

 솥바위 일명 부자바위

 정암루=임란 당시 곽재우 장군이 의병을 지휘하던 곳

 탑 바위

절벽에 굴을 뚫어 법당을 지은 일붕사

 호암 이병철 생가

 호암 이병철 생가

호암 이병철 생가

백산 안희제(白山 安熙濟 )생가

 

충절의 고장 경남 의령 출신 독립 운동가 3백 선생{백범 김구,(白凡 金九),

백암 박은식(白巖 朴殷植), 백산 안희제(白山 安熙濟)}중의 한사람

의령 땅 200마지기를 팔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씀.

 

2014년 3월 20일 조헌섭

홍의장군 곽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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