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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128)

종계변무(宗系辯誣)

by 석암 조헌섭. 2014.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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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계변무(宗系辯誣)

요즘은 한글 이름이 많다.

아이들 이름 ,식당, 예술관 이름 등(사랑이, 다슬이, 세리, 보라미, 온누리) 등,

그러면 왜 성은 순수 한글로 된 성이 없을까?

옛날에는 하층 계급인 일반백성, 노비, 상복 등은 칠덕이 갓난이 등

이름만 있고 성은 없었다. 성을 가진다는 것은 양반이 되어 족보(族譜)를

가진다는 것이다.

 

 

족보(族譜)에 나타난 성은 모두가 한문으로 기록(記錄)되어 있다.

그래서 지금도 한글로 된 성은 없는 모양이다.

어쨌던 족보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이 족보 때문에 과거

우리의 역사가 중국으로부터 얼마나 유린당하고 굴욕적인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한탄(恨歎)할 수 없다.

 

 

그리고 그릇된 사대사상으로 무능한 외교적 대응이 통분할 지경이다.

종계변무란?

종계(宗系)는 “왕가의 족보”

변무(辯誣)는 “진실이 아님을 변명함”

중국의 법전(大明會典)에 조선 시대 태조 이성계의 족보가 잘못 기록된 것을 고쳐달라고 중국에 195년간이나 빌면서 부탁한 사건이다.

 

 

즉 이성계가 이자춘(李子春)의 아들이 아니라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인임은 고려말 이성계의 정적이었는데 이성계를 그의 아들이라

한 것은 조선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모욕이었다.

 

 

이것을 안 것은 태조 3년(1394년) 때였다.

이 사건은 두 나라 사이에 심각한 외교 문제로 부각되어 태조 때부터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어 고쳐줄 것을 요구했으나 고쳐주지 않아

역대 왕들의 현안이 되어 왔다.

그러면 정확히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 것인가?

“이인임의 아들 단(태조 이성계를 말함)은 사왕(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

시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 후 여러 차례 역대 왕들이 사신(使臣)을 보내었으나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가 1588년(선조 19년) 유흥이 고쳐진 내용을 가지고 돌아왔다고 한다.

여기에 숨은 충신 홍순언(洪純彦)의 역할이 크다.

홍순언은 조선 선조 때 통역관으로 195여 년 간 외교 문제였던 종계변무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서얼 출신으로 통역, 문장도 뛰어났으며 인물도 출증하여 의리

있는 사나이였다.

통역을 위해 명나라에 갔다가 딱한 사정으로 청루(기생집)에나오게 된

규수를 구해준 것이 인연이 된 것이다.

이후 그 여인은 명나라 고관대작의 첩이 되었고 그 고관대작의 힘으로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조선을 괴롭혀온 종계변무(宗系辯誣)가 해결

되어 조선왕조 가계를 바로 잡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잘못된 기록이 만들어졌는가?

 

고려 말 공양왕 때 이성계의 정적들이 명나라로 도망을 가서 이성계를

타도하려는 목적(目的)으로

“공양왕과 이성계가 공모해서 명나라를 치려고 한다.그리고 그리고

이성계는 고려의 권신 이인임의 후손” 이라고 말 한데서 기인한다.

그 뒤 명나라는 이것을 명의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그대로 기록하였다.

 

 

조선 태조에 관한 종계를 잘못 기재한 것은 조선으로서는 왕통의 합법성

이나 왕권 확립(確立)에 중요한 문제이다.

명나라에서는 이를 계기로 이성계를 무시하고 이를 빌미로 조선을 복속

시키려 햇다. 그러면서 명나라가 조선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역사를 돌이키면 치욕적인 사건이 한 둘이 아닌데 일국의

종계를 가지고 파렴치하게 주종관계를 맺으려 하는 되놈들이 그때나

지금이나…

 

어쨌거나 한때 요동정벌 운동가지 벌였던 조선이 195년간 끌려다닌

굴욕적인 일들을 거울 삼아 역사적인 현실을 직시하고 통한의 대오각성

하여 부국강병과 국가의 백년대계(百年大計)를 도모해야 할 것이다.

 

2014년 3월 5일

석암 조 헌 섭

 

2014년 3월 5일 조헌섭 달샤벳 - Big Baby Baby 컴백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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