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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463)

진시황 사후

by 석암 조헌섭. 2023. 5. 21.

“진시황 사후”

진시황 사후(死後) 진 나라의 위세(威勢)는 땅에 떨어지고 각지의 군웅이
활거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천하 패권의 행방은 항우와 유방 두 사람의 대결로 압축되었다. 

이른바 초와 한의 쟁패다. 전세는 최강(最强)의 군단을 자랑하는 항우의
우세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유방 측의 소규모 전투(戰鬪)에서
승리(勝利)를 거듭하여 마침내 4년에 걸친 전쟁이 끝났을 때는 유방의
승리로 기결되었다.  

역사(歷史)적으로 유명한 이 역전극의 가장 중요(重要)한 요인의 하나로
항우와 유방의 통솔법(統率法)의 차이를 지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유방은 한신 잔량과 같은 뛰어난 군사의 진언에 귀를 기울이고 최대한
존중(尊重)했다. 

전리품도 자신이 독식(獨食)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공적을 세운
신하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주었다. 
서민 출신으로 뽐내기 좋아했지만, 어딘가 미워할 수 없는 느낌을 
풍기는 사람으로 인망(人望)이 집중(集中)되었다. 

한편, 항우는 유명한 집안 출신의 귀족(貴族)으로서 부하의 의견을 
거의 듣지 않고 독단적으로 전세형의 리더였다. 
전리품도 혼자 독식하거나 직속 부하만을 편파적으로 우대하고 
모든 부하에게 공정한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지 않았다.

더욱이 전리품을 사물화했다 이 때문에 부하들의 마음이 항우로부터
서서히 멀어져 가고 점점 유방 측에 투항하게 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몽고의 늑대라 불리는 징기스칸도 유방과 비슷한 타입의 리더였다. 

전리품을 자기 혼자 독식(獨食)하거나 직속 부하만을 편파적으로
우대하지 않고 모든 부하에게 공정한 논공행상을 실시했다고 한다. 
 오늘날 말할 것 같으면 회사(會社)에 이익(利益)을 보았기에
전 사원에게 보너스를 준다는 식이다.
 
이 공정한 논공행상이 유목민의 마음을 사로잡아 싸울 때마다,
부하가 늘어났으며 마침내 세계 최강(最强)의 군단을 만들었다. 
 제갈공명도 남의 땅에서는 실패할 수 있다. 

삼국지(三國志)의 매력적인 주인공 제갈공명은 7년간 5번이나 위나라를
공격(攻擊)했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실로 천재적인 전략가로서 이름이 부끄러울 정도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지모와 책략을 가지고도 이기지 못한 원인(原因)은
바로 원정군이 가질 수밖에 없는 기본적인 약점에 있다.  
위나라를 진격(進擊)하는 노선 가운데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의 좁은 
길이 있었다. 병사들이야 그렇다 쳐도 병기나 식량 운반은 순조로울 리
없었다.  

병참선은 계속 길어지는 데 비해 제대로 운반할 방법이 없었다.
제갈공명은 원정에 나설 때마다, 새로운 운반수단을 강구하였고 심지어는  
원정길을 따라 전답을 만들기도 했지만, 지리적(地理的) 불리함을
제갈공명마저 괴롭힐 정도로 위력적이다. 

반대의 관점에서 보면 홈, 강점 자체가 강적을 쳐부수고 전쟁(戰爭)에서
승리하려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조건(條件) 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이 익숙한 장소일수록 자신의 모든 힘을 발휘(發揮)하는데
유리하다.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아 자기 나라로 만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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