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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128)

임정 파리위원부

by 석암 조헌섭. 2015.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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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파리위원부, 국제회의서 첫 독립승인 받아냈다

입력 2015-08-13 01:42:09
수정 2015-08-13 02:08:25
김규식이 이끌던 파리위원부는 1919년 국제사회당 대회에서 한국 독립승인결의안(사진 왼쪽)을 통과시켰다, 서영해는 1930년대 이후 유럽에서 독립외교를 책임졌다. 소설 『어느 한국인의 삶과 주변』(사진 오른쪽)도 썼다.

"일본의 권리와 이익을 침해하려는 한국인들이 평화회의에서 활동하려 한다. 폐회 때까지 입국이 허가되지 않도록 해달라."

 1919년 1월 3일 프랑스 외무성에 대외비 문서가 도착했다. 주프랑스 일본제국대사관이 보낸 문서의 제목은 ‘한국인 입국 제한 요청’이었다. 일제가 경계한 대상은 신한청년당 김규식이 이끄는 대표단. 하지만 이들은 두 달 뒤인 3월 일제의 방해를 피해 파리에 도착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전후 처리 논의를 위한 파리강화회의(1919년 3~6월)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그해 4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됐고, 파리에 머물고 있는 김규식은 외무총장 겸 주파리위원부 대표위원으로 임명됐다. 임정 최초의 ‘외교 미션’이었다. 나라를 빼앗긴 뒤에도 외교는 계속됐다. 일본에 대항한 임시정부의 항일외교였다. 1920년 임시정부 안창호 내무총장은 "군사와 외교가 독립운동의 절대적 수단과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임정 첫 해외 공관=파리강화회의 이후에도 파리위원부는 활동을 계속한다. 1919년 8월 스위스 루체른에서 25개국이 모인 국제사회당대회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그리고 한국독립승인결의안을 통과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한국의 독립을 인정한 첫 국제회의였다.

 파리위원부는 홍보를 위해 통신국도 설치했는데, 월간 『자유한국』을 발행했다. 1920년 4월부터 1921년 5월까지 32~36쪽 분량으로, 매호 1000부 발간했다. 각지에서 벌어지는 일제의 만행과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소개했다. 파리위원부가 발행한 『구주의 우리 사업』에 따르면 1919년 3월부터 1920년 10월까지 프랑스 신문에 한국 관련이 게재된 건수가 133종 423건이나 됐다. 교황 베네딕토 15세도 "한국 교회의 총애하는 자녀들이 받는 핍박에 대해 우려하며 속히 자유와 행복의 생애를 하기를 천주께 기구한다"는 서한을 파리위원부에 보냈다.

 #서영해의 공공외교=1930년대 이후 유럽 지역의 독립 외교는 서영해(1902~?)가 도맡아 했다. 1929년 파리에 도착한 그는 숙소인 말브랑슈 7번지에 고려통신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강연, 언론 기고 등을 통해 조국의 현실을 알렸다. 프랑스어로 『어느 한국인의 삶과 주변』이란 소설도 집필했다. 한국인이 쓴 최초의 프랑스어 소설이다. 한국의 유구한 역사와 일본의 압제를 서술했다. 3·1운동 선언문도 삽입했다. 서영해의 활동은 요즘으로 치면 ‘공공외교’다. 그가 1940년 7월 20일 임정 외무부장 조소앙에게 보낸 편지엔 선진 공공외교의 개념이 담겨 있다. 그는 "고려통신사의 활동은 조국 소개, 왜(倭)놈 외교와 선전(宣傳)을 방언(防言·말로 막아냄)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이어 "외교와 선전의 방책은 오직 진실하고, 광명정대하여 세인의 신용과 존경을 얻는 데 있다"고 했다.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4월 29일) 직후 일제가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에서 안창호 등 독립운동가 11명을 체포했을 때다. 서영해는 각 언론사에 ‘유럽의 양심에 고함’이라는 자료를 배포해 일제의 만행을 알렸다. 여론이 들썩였고, 프랑스인권연맹회장이 외무성에 "프랑스는 명성을 저버리고 평화주의자들인 한국인들을 가해자들에게 주저 없이 넘겼다"고 항의했다. 프랑스 정부는 베이징과 상하이 공관을 통해 일본 측에 해명을 요구했다. 11명 중 7명은 풀려났다.

 #임정, 국제 승인을 받다=파리강화회의 실패 후 임정은 혁명에 성공한 소련으로 눈을 돌린다. 1919년 12월 상하이로 온 러시아 장성 포타포프는 임정 인사들에게 레닌을 만나 도움을 청하라고 조언한다. 임정은 국무총리 이동휘의 측근인 한형권을 모스크바에 특사로 보낸다. 1920년 5월 모스크바에 도착한 한형권은 레닌을 만나 ▶임정 승인 ▶독립운동 자금 지원 ▶독립군 지휘관 양성을 위한 학교 건설 ▶독립군 무장 지원 등 4개 요구 사항을 전달했다. 레닌은 요구 사항을 들어주기로 한 뒤 40만 루블의 군자금까지 줬다. 단국대 한시준(사학과) 교수는 "소련으로부터 주권국가로서 첫 번째 승인을 받은 것"이라 고 말했다.

 파리강화회의 후속 조치를 위해 미국이 워싱턴회의(1921년 11월~1922년 2월)를 소집하자 임정은 중국 쑨원(孫文)과도 교섭했다. 쑨원이 광저우(廣州)에 세운 호법정부(護法政府)가 태평양회의에 중국 대표로 참석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1921년 10월 임정 국무총리 대리 신규식이 특사로 광저우로 간다. 신규식은 쑨원과 2시간에 걸쳐 회담했다. 신규식은 "임정은 호법정부를 승인한다. 호법정부 역시 임정을 승인해달라"며 교차 승인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쑨원은 "한·중은 서방의 영·미와 같다. 중국은 마땅히 원조할 의무가 있다"고 답했다.

 

"조선인이 상해에 반란정부 조직" … 총독부, 임정에 위기감

입력 2015-08-13 01:40:12
수정 2015-08-13 02:06:14
임시정부는 중국 충칭(重慶)에서 광복을 맞았다. 1945년 11월 3일 환국에 앞서 태극기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앞줄 왼쪽 넷째가 임 정 마지막 주석인 김구 선생. 임 정은 환국 뒤에도 박찬익을 대표로 하는 주화대표단을 남겨 한국민의 귀국을 도왔다. [사진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일제는 임시정부의 외교활동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당시를 기록한 문서들을 보면 일제가 임정의 외교활동을 ‘눈엣가시’로 여긴 사실이 군데군데 드러난다.

 1921년 1월 2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일본 외무성 외무차관에게 보낸 문서.

 "이른바 대한임시정부 법무총장이자 국무총리인 신규식은 불령(不逞)한 조선인 10여 명과 광둥(廣東)에 도착해 중국 남방정부의 환영을 받았다. 불령한 조선인들이 과격한 행동을 하지 않는 한 단속을 단행하기 어렵고(중략)". 임시정부 인사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과 독립기념관이 공개한 외교문서 등에 따르면 일제는 특히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부터 1920년대 중반까지 임정 활동을 집중 감시했다.


 1919년 10월 14일 밥스트 주일 프랑스 공사가 조선총독인 사이토 남작을 만난 뒤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는 일제가 임정에 대해 수집한 정보가 들어 있다. "그들의 정보에 따르면 한국 이민자들이 명실상부한 반란 정부를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에 조직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이 정보를 보충한 뒤 우리에게 이 암약하는 정부의 해산 혹은 인도를 요청할 것 같다." 임정 수립 불과 6개월 뒤의 일이다.

 1919년 5월 15일 주상하이 프랑스 총영사관 직무대행 영사 윌덴이 주베이징 프랑스 전권공사 포프에게 보낸 보고서. "일본 측이 ‘심각한 범죄 용의자’라고 밝힌 한국인 3명에 대한 체포영장에 연서해달라고 요청이 왔다. 저는 달리 어떤 방도가 없어서 서명했지만 당사자들에게 비밀리에 위험을 알리도록 했다. 실제로 일본 형사들은 눈앞에서 사냥감을 놓치고 말았다."

 임정 인사들은 상하이 시절 도움을 준 데 대해 주상하이 프랑스 총영사관에 찾아가 사의를 표했다. 1919년 10월 20일 윌덴 영사는 안창호를 만난 뒤 ‘제가 상대한 이들은 모두 한국의 명문가 출신들로 진정한 애국자이며 자신들의 목숨도 희생할 준비가 돼 있다’는 보고서를 남겼다. 안창호는 이날 일본이 체포하려는 임정 인사들의 명단을 윌덴 영사에게 전했다. 문서에 안창호는 스스로는 ‘광작’, 김구는 ‘둑구배’, 이동휘는 ‘이백’, 신규식은 ‘김재괄’이라는 가명을 쓴다고 적었다.

 1920년 6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은 외무차관에게 "신채호를 주필로 하는 독립신문은 국가 부흥에 관해 격한 감회를 서술하거나 제국을 비판하는 허무맹랑한 언설을 담고 있다. 임시정부 행동이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고도 보고했다.

 

증조부는 ‘헤이그 특사’ … 그는 1920년대까지 일본과 싸웠다

입력 2015-08-13 01:36:51
수정 2015-08-13 01:58:32
‘사라진 특사’ ‘비운의 독립운동가’.

 제 증조할아버지 이위종 지사를 이르는 말들입니다. 그는 조선의 양반에서 러시아제국의 장교로, 다시 혁명정부의 공산당원으로 여러 번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독립을 향한 열망만큼은 저버리지 않았죠.


 이 지사는 20대 초반인 1907년 6월 고종 황제의 밀지를 받고 이상설·이준 열사와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됐습니다. 헤이그 특사 3인은 일제의 방해 공작으로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이 지사가 외신 기자들 앞에서 한 연설 ‘한국을 위한 호소(A Plea for Korea)’는 많은 지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대한제국 황제의 서약이 없는 을사조약은 명백한 불법이다." 유창한 영어 실력과 서양식 매너가 몸에 밴 이 지사를 "대한제국의 왕자"라고 소개한 언론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헤이그 특사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대통령 면담을 시도하고 영국·프랑스 등을 돌며 국권 침탈을 막기 위한 외교전을 펼쳤지만 안타깝게도 모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조선 말 법부대신을 지낸 이범진의 차남으로 태어난 이 지사의 유년 시절은 풍족했다고 합니다. 1896년 이 지사는 미국 공사를 맡게 된 아버지 이범진을 따라 처음 조선 땅을 떠났습니다. 1901년에는 러시아 공사로 자리를 옮긴 아버지와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습니다. 그때 그는 조국 땅을 다시 밟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을 겁니다.

 러시아 귀족인 바레리안 카를로프 놀켄 남작의 딸 엘리자베타와 결혼한 것은 1905년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오페라극장에서 처음 만났다고 해요. 한국식 복장과 유교문화를 중시했던 이범진 공사와 달리 이 지사는 서양식 제복을 입고 오페라 공연도 즐겼다고 합니다. 그는 증조할머니와 결혼하기 위해 러시아 정교로 개종까지 했습니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참가가 실패로 돌아가자 이 지사는 아버지 뜻에 따라 러시아 연해주 지방으로 가 항일운동을 했습니다. 그곳에서 작은아버지인 이범윤, 안중근 의사 등과 함께 항일투쟁을 위한 ‘동의회’를 조직했죠. 고종 황제의 비밀 서한을 러시아 왕실에 전달하거나 극동 지역에 군자금을 전달했다고 합니다.

 당시 러시아의 고문서에선 ‘왕족 리’로 불렸다고 해요. 러시아 이름 ‘블라지미르 세르게예비티 리’도 썼고요. 1918년 러시아 볼셰비키 당(黨)에 가입한 이후로는 ‘당원번호 462983’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국권이 일제에 침탈된 다음해인 1911년 이범진 공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은 이 지사의 삶에 큰 전환점이 됐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제국의 군사학교에 들어가 장교가 됐고요. 이 지사와의 사이에 세 딸을 두었던 증조할머니 엘리자베타에게는 1916년 실종 통지서가 날아왔습니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가족들과 연락이 끊어졌죠. 한국에서 한때 이 지사가 1916년 전사 통지를 받은 것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지만, 1920년대까지 일제와 싸움을 계속했다는 기록이 최근 잇따라 발견되고 있습니다.

 1918년 4월 러시아 혁명군(적군·赤軍)에 들어가 극동 지방에서 항일투쟁을 벌였다는 기록이 대표적인데요. 3·1운동이 있었던 1919년 모스크바의 한인집회에서 "시베리아 지역에서 항일투쟁을 해 일제를 몰아내자"는 연설을 했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습니다. 일제는 러시아 정부에 그를 러시아 영토 밖으로 추방하라는 요구를 끊임없이 했다고 합니다.

 일본 외무성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가 1921년 10월 6일 본국으로 보고한 ‘배일선인(背日鮮人) 이위종에 관한 건’이란 기록에는 일제가 이 지사에 관한 정보를 수집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위종이 1921년 8월 러시아 혁명정부로부터 공산주의 선전비 명목으로 많은 돈을 갖고 중국 만주와 접경한 블라고베셴스크 지역으로 왔다가 무고로 현지에서 붙들려 돈을 빼앗긴 뒤 투옥됐다. 이후 시베리아 중부인 치타 지역으로 갔다’.

 러시아 외교부 문서에 1924년 10월 치타 지역의 국영기업 감독관을 맡았다는 기록도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이후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몇몇 러시아 역사학자들이 "1930년대 스탈린의 대숙청(30~38년 스탈린이 당내 반(反)스탈린파 공산당원·군인 및 고려인 등 소수민족을 탄압한 사건) 때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할 뿐입니다.

 과연 그는 1945년 조국의 해방을 보았을까요. 아니면 끝내 이루지 못한 독립의 꿈을 가슴에 안은 채 이역만리 땅 어딘가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을까요. 그의 유해를 찾아 조국으로 모셔오고 싶습니다.

이유정 기자 uuu@joongang.co.kr

※이 기사는 이위종 지사의 증손녀 율리아 피스쿨로바(46)의 증언과 학계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율리아의 시점에서 재구성한 것입니다.


◆특별취재팀=유지혜·안효성 기자, 왕웨이 인턴기자, 김유진·송영훈 대학생 인턴기자 wisepen@joongang.co.kr

‘임정 영사 1호’ 황기환, 일제에 끌려갈 뻔한 한인 35명 구출

입력 2015-08-13 01:41:15
수정 2015-08-13 02:07:17
1919년 가을, 200명의 한인 노동자가 영국에 도착했다. 러시아 무르만스크에서 연합국 지휘 아래 일하다 영국군과 함께 철수한 사람들이다. 임시정부 파리위원부가 나섰으나 일본은 이들을 중국 칭다오(靑島)로 데려가겠다고 했다. 영국 정부는 한인들을 파리위원부에 넘겨주려 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이들을 받아들이겠다고 구두로 약속했던 프랑스도 국내 여론을 의식해 없던 일로 하자고 말을 바꿨다. 이때 런던과 파리를 오가며 양국 정부 설득에 나선 이가 임정 파리위원부 서기장 황기환(?~1923·사진)이다. 백방으로 뛴 끝에 35명을 구해 냈다. 그 35명은 재법한국민회를 설립했다. 당시 한인들은 프랑스를 법국(法國)이라고 불렀다. 유럽에서 설립된 최초의 한인단체다. 한인 노동자들을 위해 96년 전 황기환이 한 일은 지금의 재외국민 보호, 영사 업무였다. 임정의 외교관이 교섭을 통해 국민을 구해 낸 최초 사례다.

 미국에서 유학한 황기환은 1919년 6월 프랑스로 와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참석을 보좌하다 파리위원부 일을 이어 맡게 된다. 20년 10월부터는 런던 주재 외교위원도 겸했다. 그는 친한 언론인 매켄지와 협의해 ‘한국친우회’를 결성하는 등 한국 문제에 관심이 없던 유럽인들의 관심과 동정을 이끌어 내기 위해 애썼다. 21년 이승만의 워싱턴회의 참석을 보좌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런던을 자주 왕래하며 외교활동을 계속했다. 그는 23년 4월 뉴욕에서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황기환의 유해는 지금까지 92년째 뉴욕 퀸스의 마운트 올리벳 공동묘지에 쓸쓸히 묻혀 있다. 무관심 속에 방치됐던 황기환의 묘는 2008년 뉴욕한인교회 장철우 목사에 의해 발견된다. 사망 당시 미혼으로 유가족이 없어 무덤 위치가 잊혀졌다고 한다.

 국가보훈처는 2013년 묘소를 확인하고 유해를 대전 현충원에 안장하겠다고 밝혔으나 3년이 돼 가는 지금껏 진전이 없다.

 보훈처 관계자는 12일 "유족이 없는 독립유공자의 시신을 해외 법원의 확인을 거쳐 국내에 모셔 오는 경우가 처음이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유지혜·안효성 기자, 왕웨이 인턴기자, 김유진·송영훈 대학생 인턴기자 wisepen@joongang.co.kr

[광복 1945~2015] 임시정부 항일 외교 주역들

[중앙일보] 입력 2015.08.13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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