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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128)

105인 사건’에 와해된 신민회

by 석암 조헌섭. 2015.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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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권회복 꿈꾸다 ‘입력 2015-08-02 01:07:57
수정 2015-08-02 03:18:25

1909년 11월 5일 일본 도쿄에서 이토 히로부미 장례식을 치르고 있다. 오른쪽 예복 대열 맨 앞이 조선 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사진 권태균]
[총평]

대한제국은 을사늑약으로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했다(1905). 을사늑약으로 인한 외교권 박탈은 사실상 대한제국의 종말과 다름없었다. 전국적으로 을사늑약 반대 투쟁과 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하여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규탄했다. 을사늑약에 서명한 대신들의 처벌과 조약 폐기를 요구하는 상소도 잇따랐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합법적인 항일 활동이 어려워지자, 이승훈·양기탁·이회영·안창호 등의 주도로 1907년 비밀 결사 형태의 신민회가 조직되었다. 신민회는 국권 회복을 위한 실력 양성을 주장했다. 신민회는 8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한 전국적 조직으로 성장했다. 신민회는 국권 회복과 공화정 체제의 국민국가 건설을 목표로, 교육, 언론 및 출판, 민족 산업 육성, 독립군 양성 등 폭넓은 활동을 전개했다.

이 시기에는 국권 수호를 위한 교육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많은 학회가 설립되었다. 이들 학회는 학교를 세우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과서를 보급했으며, 월보를 발행하여 민중을 계몽했다. 당시 애국 계몽 운동가들이 ‘제일 급선무’로 본 것은 ‘세상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사람들을 깨우치는 것’이었다.

1905년 전후로 계몽 운동가들이 각지에 사립학교를 설립했다. 이는 국권회복에 필요한 인재 양성을 위한 것이었다. 1910년경에는 2천여 개나 되는 사립학교가 설립되었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신민회는 경제·문화적 차원의 실력을 키우는 것만으로는 독립을 이루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국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마련했다. 이들은 만주로 망명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안중근의 사촌 안명근이 독립 자금을 모금하다 적발되자, 일제는 이를 총독 암살 미수 사건으로 날조하고 수백 명의 애국지사를 검거하여 105인을 구속시켰다. 신민회는 일제가 날조한 105인 사건으로 와해되었다(1911). 국내 민족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많은 애국 계몽 운동가들이 국외로 이동했다. 의병 부대들도 대부분 만주와 연해주 등 국외로 활동 근거지를 옮겨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한편 을사늑약 체결의 원흉을 처단하기 위한 움직임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재명은 매국노를 처단하는 것이 국권 수호의 지름길이라 여기고, 이완용을 칼로 찔렀다.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장인환과 전명운이 일제의 한국 침략이 정당하다고 선전하는 외교 고문 스티븐스를 저격했다(1908). 1909년 10월 만주의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은 을사늑약 체결의 주역이자, 조선의 식민지화를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그는 최후진술에서 ‘대한의군의 참모 중장으로서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이토를 죽였기 때문에 형사범이 아닌 전쟁포로로 대우해 줄 것’을 당당하게 주장했다. 또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동양 평화를 위한 의로운 전쟁이다"라고 선언했다.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던 중 처형되었다. 이 글의 핵심은 한국을 침략한 일본의 잘못을 깨닫게 하는 데 있었다. 그는 이 글에서 국가 간의 평등과 상호 협력으로 국제 평화를 이룩하자고 주장했다. 이는 갈등과 분쟁 극복을 위한 보편적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총평=김취정 (고려대 강사·문학 박사)

[핵심 키워드]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이를 반대하는 의병 투쟁이 본격화되었으며, 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하여 조약의 부당성을 규탄하였다. 조병세·이상설 등은 을사조약에 서명한 대신들의 처벌과 조약 폐기를 황제에게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민영환·조병세·황현 등은 자결로 저항했다. 을사오적을 처단하기 위해 ‘자신회’라는 암살단이 조직되기도 했다. 1907년 이승훈·양기탁·이회영·안창호 등이 주도하여 비밀 결사 형태의 신민회가 조직되었다. 신민회는 국권 회복과 공화정 체제의 국민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교육, 언론 및 출판, 민족 산업 육성, 독립군 양성 등 폭넓은 활동을 전개했다. 신민회는 일제가 날조한 105인 사건으로 와해되었다.

국내 민족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많은 애국 계몽 운동가들이 국외로 이동하였다. 신민회 일부 간부들은 국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마련하고 무장 투쟁을 준비했다. 1909년 10월 만주의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던 중 처형되었다. 국권 수호를 위한 교육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어 많은 학회가 설립되었다. 이들 학회는 학교를 세우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과서를 보급했으며, 월보를 발행하여 민중을 계몽했다. 일본은 한국 병합을 실현하기 위해 1909년 9월부터 2개월간에 걸쳐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의병을 토벌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가혹한 탄압으로 국내에서 활동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의병은 만주와 연해주로 이동하여 국외 무장 투쟁으로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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