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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128)

희망*용기*위로를 위한 글

by 석암 조헌섭. 2015.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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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 이조(桐谷李晁)
 
이조(李晁, 1530∼1580)의 자는 경승(景升)이고, 호는 동곡(桐谷)이며,
본관은 성주(星州)로 단성(丹城)에 거주하였다.
그는 1530년 산청 원당에서 부사직(副司直) 계유(繼裕)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에 관한 자료는 {동곡실기(桐谷實紀)}가 있다. 

7세 때(1536년) 사직공에게서 {소학}을 배웠고,
10세 때(1539년) {논어}와 {맹자}에 통하였으며,
12세 때(1541년) 겨울에 {상서}를 공부하였다. 
17세 때(1546년) 중형(仲兄) 부사공(府使公) 창(昌)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19세 때(1548년) 겨울에 합천인 이광우와 더불어 단속사에서 {춘추}를 읽었고,


32세 때(1561년) 10월에 덕천에 가서 남명선생의 문하에 들어가서
   위학지요(爲學之要)를 듣고 경의(敬義) 두 글자로써 힘 쓸 것을 배웠으며
   오건, 최영경, 김우옹, 하항(河沆), 유종지 등과 더불어 서로 오가며 강마하였다. 

김우옹의 [동강일기]에 의하면 '이조와 산천재에서 공부하였더니,
성품이 순고(醇古)하며 얽매이지 않았으며 호의(好義)한다.'고 하였다.
특히 오건과의 친분은 남달랐다. 덕계가 세상을 떠나자 동곡은 제문을 지어
"같은 문하에서 수학한 여러 해 동안 형제와 같이 우애 돈독했네."라고 하여
마치 이끌어 주던 형이 세상을 떠난 것 같이 슬퍼하였다.

33세 때(1562년) 겨울에 죽각 이광우가 방문하여 수일 간 공부하였다.
37세 때(1566년) 봄에 산천재에 가서 남명선생을 뵙고 여러 달을 공부하였다.
38세 때(1567년, 정묘) [동강일기]에 의하면, '이조가 정묘년에 김우옹과 함께
    같이 시험을 치렀는데, 괴원(槐院)에서 선진(先進)들이 희롱하여
    면신례(免身禮)를 행하여 내가 받지 않고 꾸짖자,


   공이 그들을 대함에 혹시라도 훼방함이 있을까 하여 제지하여 말리므로 내가 
   한강(漢江)을 건너며 남풍사(南風辭)를 지어서 몸소 그 뜻을 보였다."고 하였다.
39세 때(1568년) 진주훈도(晋州訓導)가 되었다.
41세 때(1570년) 가을에 남명선생을 찾아 뵈었다.


44세 때(1573년) 5월에 성균관 학정(成均館學正)에 제수되고
    6월에 호송관(護送官)이 되어 왜사(倭使)를 동래(東萊)에서 호송하였다.
   이 때 일본 사신이 후추(胡椒) 한 자루를 선물로 주려하자,


동곡은 받지 아니하고 돌려 보내며 말하기를, '신하된 자가 사사로이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일본 사신은 이를 듣고 그 청렴함에 놀라워하면서
말하기를  '선생의 청렴함은 한 조각 맑은 얼음과 같아 이 더운 6월에도
서늘하게 느껴집니다'라고 하였다고 하니 조야에서 전송(傳誦)하였다.

45세 때(1574년)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옮겨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
    되었고, 겨울에 공조정랑(工曹正郞)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뒤에도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가 벼슬을 할 때, 청렴함 때문에 조정에서는 시기와 질투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을 탐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당시 조정에서는 녹봉을 봄, 여름, 가을, 겨울 4차례에 나눠주었는데,
동곡은 혹 아파서 공무를 보지 못한 때가 있었으면 녹봉을 계산하여
그 만큼은 돌려보냈다.


이러다 보니 같은 벼슬에 있는 사람들은 동곡을 보고 자기만 깨끗한 척한다고
하면서 시기와 질투를 하였다. 이런 동곡은 탐관오리들과는 한 조정에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벼슬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낙향한 것이다. 

[동강일기]에 의하면, 김응가(金應可)가 말하기를, 
'그는 문장이 척당한 선비로서 그 맡은 지위를 나아가 시험하지 못하니
가히 애석한 일이라.'고 하였다. 

47세 때(1576년) 봉상주부(奉常主簿)를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원당정사(元堂精舍)를 지었다.
   이 때 스스로 진취(進取)의 뜻을 끊고 항상 이르기를,


'사대부의 출처가 가이 시운(時運)에 따라 삼가하지 않을 수 없다.'하고
뜰에 푸른 오동나무 한 그루가 있거늘 이로 인하여 스스로
호를 동곡(桐谷)이라 하고 시에, '뜰 앞에 한 그루 나무가 사랑스럽게 섰으니, 
그 모습 정정(亭亭)하여 홀로 푸르름을 지녔구나, 때로 보아하니


가지와 잎이 무성도 하여, 이 가히 봉황이 둥지를 틀만 하겠네.'라고 하였다.
그는 매일 의관을 바로 하고 단정하게 앉아서 {역경(易經)}을 정밀하게 읽고
길흉소장(吉凶消長)과 진퇴존망(進退存亡)의 이치를 연구하여 초연히 홀로
그 나아감을 깨달았으나 사람들은 스스로 알지 못하였다.

각재 하항의 만시(挽詩)에, '십 년 동안 가식(家食)하여 진육(眞肉)을 얻어,
임천(林泉)에 묻혀 삼역(三易)에 등공(燈功)하여 귀정(鬼精)을 본 것'이라는
구(句)가 있다. 이는 만년에 동곡(桐谷)이 은거하며 {주역(周易)}에 잠심하여
스스로 깨침이 있어 가히 신귀(神鬼)의 묘경(妙境)에 들어감을 평한 것이다. 

교유 : 34세 때(1563년, 계해) 봄에 산음(山陰) 자연동(紫烟洞)에 가서
덕계 오건을 방문하였고, 여러 날을 더불어 머물며 선비와 군자의 출처에
대하여 논하였으며 오건과 형제처럼 가까이 지내며 오갔다고 한다. 

서원창건활동 : 47세 때(1576년, 병자) 8월 제현과 더불어 덕천에서
남명선생의 사우(祠宇)를 지었는데 최영경, 하항(河沆), 손천우, 유종지,
하응도, 이로, 이광우, 이천경 등과 더불어 덕천서원을 지을 것을 합의하고
오가며 선생 사우에 배알하였다.

50세 때(1579년) 세도(世道)가 날로 더함이 없어 세사(世事)에 뜻을 두지 않고
   두문(杜門)하고 그윽히 사문(師門)의 지결(旨訣)을 함양함으로써
   항상 스스로 신근(身筋)하여 이르기를, "고요히 거경(居敬)에 주장하지
    아니하면 함양의 공부를 이룰 수 없고,


잠심(潛心)하여 연의(硏義)하지 않으면 곧 성찰(省察)의 효과를 거둘 수 없으니,
대개 궁리는 함양의 공부 가운데 있어, 이를 기를 것이며,
함양은 궁리의 공부 가운데 있어 이를 기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가을에 합천에 있는 용문폭포(龍門瀑布)를 보러 갔다.
장자 유함(惟 )이 박민(朴敏), 이흘(李屹)을 모시고 갔다.


51세 때(1580년, 경진) 12월 23일에 원당별서(元堂別墅)에서 세상을 떠난 후
    1581년(선조 14년) 2월 27일에 사림들이 현북(縣北) 10리 가산(嘉山)
    신수(新水) 위에 안장하였다.


부인과 동조(同兆)하고 하항(河沆)이 [묘갈명]을 짓고 하수일(河受一)이
[묘지명]을 짓고 강연(姜淵)이 빗돌에 글을 썼다.
숙종 때 단성(丹城)의 두릉서원(杜陵書院)에 배향되고,
헌종 때에는 성산(星山)의 안산서원(安山書院)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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