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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128)

김구 선생

by 석암 조헌섭. 2015.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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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1876~1949) 


김구 선생 

건국의걸림돌이었나 통일 향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나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도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한국인이 존경하는 정치지도자 중 한 사람 김구. 그는 분단의 위기 앞에서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을 통해 통일한국을
염원했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1948년 8월 15일 남한은 대한민국 단독 정부를 수립했고,
분단은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으로 이어졌다.

 김구의 삶은 망국의 비애와 광복의 기쁨, 그리고 분단의 아픔까지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교과서와 언론에 드러난 김구를 통해 광복 후 혼란했던 시대에 대해 알아봤다.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이끌었던 독립운동가
 겸 정치지도자.
구한말 혼란했던 시대 상황만큼 그의 삶도
 파란만장했다.
17세 때 동학군 선봉장으로
활동했고 19세엔
만주에서 활동하던 의병장
김이언 아래서 의병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자(을미사변) 이듬해 2월 스치다 조스케를
국모시해죄로
 처단하기도 했다.

 사건 현장엔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놈을 죽였다”란 글귀와 함께 
당당하게 당시 이름 김창수를 남겼다고 한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일본인 스치다
 조스케가 한국인으로 변장한 일본 장교였다고 기록했지만
 최근 연구에선 민간인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이 사건으로 체포돼 사형을 언도 받았지만 고종 특명으로
 사형을 면했다.
  1900년부터는 학교를 세워 애국계몽운동을 펼쳤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08년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에 가입해 이동녕·안창호·이시영
·안태국 등과 함께 조직을 이끌었다.
 
 1919년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출범하자 중국으로 건너가
 임시 정부 활동을 했다. 이후 1945년 광복을 맞을
 때까지 26년 동안 임시 정부
 국무령과 주석 등을 지내며
 독립운동을 했다.
 
 광복 후 한국 독립당을 이끌면서 신탁 통치 반대 운동과 통일정부수립 운동을
 펼쳤다.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에게 저격당해 숨졌다.
 장례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첫 번째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임시 정부는 국내외 독립운동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했다.
미국·영국·소련 등 강대국에게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는 외교활동뿐만 
아니라 만주의
 독립군을 지원하고 독립신문을 간행하며 계몽운동도 했다. 

 하지만 강대국의 외면으로 별 소득을 얻지 못한채 오히려 일제의 탄압으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됐다.
자금조달까지 막히면서 임시 정부는 위기를
맞는다.
교과서 8종 모두 ‘1920년대 중반 이후 일제의 감시와 탄압, 내부 분열
그리고 자금과 인력 부족으로 임시 정부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고
서술한다.


임시 정부의 위기를 타개한 인물이 김구였다.
김구는 31일본 공관 등 주요
시설을
타격하고 친일파를
처단하는 의열투쟁을 하기 위해 한인 애국단을
조직
  애국단원이었던 윤봉길은 중국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 국왕의 생일 및 상하이
사변 승리를 축하하는 기념식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장성과 다수의 고관을 처단했다.

 
 당시 중국 국민당 장제스는
“중국 100만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한 청년이해냈다”고 극찬했다.
  미래엔은"윤봉길 의거를 계기로 중국 국민당 정부도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게
되었다. 

 이로써 한·중 연대의 항일 전선을 구축하는 결정적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는
이후 임시 정부가 한국 광복군을
 조직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적었다.
  김구의 지도력과 윤봉길의 의거가 중국 내 항일독립운동의 입지를 크게 넓힌
것이다.


40년대에 이르러 국제정세가 급변했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후
수세에 몰리자
 독립운동가들은 일본 패망을
예견하고, 광복 후 발언권을
가지려
우리 힘으로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구는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고 중국 주둔
미국
전략
정보국(OSS, CIS의 전신)과 함께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작전 결행일(1945년 8월 20일)을 닷새 남겨 놓고 일본이 전면 항복을
선언한다.

 
 김구는 통탄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이렇게 기록했다. “기쁜 소식이라기
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일이었다. 우리가 이번 전쟁에서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에
 국가 간에 발언권이 박약하리라.”

신탁 통치 반대 운동
제2차 세계대전 후 종전처리를 논의한 카이로회담(1943년11월)· 얄타회담
(1945년 2월)·
포츠담회담(1945년 7월)에서 한국 독립이 언급됐다. 
 하지만 결국 연합국 승리로 광복이 이뤄지다보니 한국의 발언력은
약할 수밖에 없었다. 

 45년 8월 소련군은 한반도에 진주해 북쪽 지역을 빠르게 점령해 갔다.
 미국은 남쪽 지역을 통치하며 미군정을 실시했다.
 위도상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갈렸다.

 45년 12월 미국·영국·소련 외무장관이 모인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 임시 민주 정부 수립과 미·소 공동 위원회
 개최, 최고 5년간의 신탁 통치 실시 등이 결정됐다.

광복의 기쁨도 잠시, 신탁 통치 결정이 알려지면서 정국은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한국인에게 신탁 통치는 제2의 식민지배로 인식됐다.
 천재교육은
 "신탁 통치를 둘러싼 찬반 논쟁으로 좌익과 우익의 갈등이 깊어지고
격렬한 대립이 일어났다”고 썼다.

 
 김구·이승만 등 우익세력은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좌익 세력은 처음엔 신탁 통치를 반대했지만 임시 민주 정부
수립이
우선이라고 보고 신탁 통치 찬성으로 돌아섰다.

 김구는 신탁 통치 반대 세력 중에서도 가장 강경했다.

 김구는 임시 정부 내무부의 이름으로 “현재 미군정에 속해 있는 모든
관리는 앞으로 임시 정부에 예속된다”라고
 선언한다.

 상당수 미군정청 소속 한국인이 김구를 따라 반탁 대열에
 합류했다. 김구는 미군정과 대립각을 세웠다.
미군정은 이를 쿠데타 음모로 받아들였다. 

 주한 미군사에 따르면 다음 날 미군정 책임자였던 하지 중장은 김구를
미군정청으로
호출해 권총을 들이대며 ‘나를 속이면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했다고 한다.

”(중앙일보 2008년 7월 31일 ‘좌우 충돌 도화선 한국전쟁·체제대결 번져’)

갈등은 증폭됐다. ‘반탁=반소=애국, 찬탁=친소=매국’ 등식이
 퍼졌다.
신탁 통치를 둘러싼 대립과 갈등은 정치집단 간 유혈충돌과 암살로까지
이어졌다.

 
 이 와중에 두 차례에 걸친 미·소 공동 위원회는 반탁 세력의 위원회
참여 문제를 결론짓지 못한채
결렬된다.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국제연합(유엔)에 넘겼고 남북한 총선거가 결정됐다.

 하지만 소련은 총선거를 감시할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했고, 결국 남한은 단독선거를 치렀다.

통일정부 가능했을까

 
김구의 글씨. 헌신조국 (통일된 조국을 위해 몸을 바친다)
개화공정미술 소장.
김구와 이승만은 신탁 통치 반대에는 뜻을 함께 했지만 정부 수립
방법에선 대립했다.
김구는 통일정부를, 이승만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내세웠다.

 48년 남한 단독 선거 결정이 내려지고 남북이 분단될 위기에 처하자
김구는
 김일성에게 남북 지도자 회의를 제안한다.

 미·소 영향력에서 벗어나 남북 정치지도자가 직접 만나자는
 제안이었다. 그렇게 성사된 4월 회담에서 단독 정부수립 반대,
신탁 통치 반대 등을 내용으로 한 결의문을 채택했다.
하지만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막지는 못했다.

 
 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가 치러졌고, 8월 15일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북측에선 9월 9일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 들어서면서 결국
남북은 분단됐다.


 남측이 단독 총선거를 하지 않았더라면 김구가 염원했던
 통일 정부는
가능했을까.
 지금의 평가는 불가능 쪽에 무게가 실린다. 리베르스쿨은
 “북한에서는 46년 이미 실질적인 정부의 성격을 띤 북조 임시
 인민 위원회가 조직되었다”고 적었다.
 
 “결정적 증거는 45년 9월 20일 북한에 내려진 스탈린의 지령.
 ‘소련군 점령지역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라’는
 내용이다…헌법·군대와 같은 핵심적 국가 시스템에 대한 논의가 이미
48년 2월 무렵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던 것이다.
 
”(중앙일보 2008년 7월 18일 ‘이승만 ‘정읍발언‘은 소련 전략 꿰뚫은
현실적 대응’)
 금성교과서는 “김구가 추진했던 남북 협상은 유엔이
남한 단독
 선거를 결정한 데다가 북한 역시 내부적으로 독자적인 정부
수립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성과를 얻기 어려웠다”고
평가한다.


김구가 통일정부수립을 주장하며 5월
 10일 총선을 거부한 건 오판이라는
문제제기도 있다.
 “김구·김규식 같은 임시 정부 출신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들이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며 끝내 총선을 보이콧한 점은
건국사의 최대 아쉬움으로
꼽힌다. 

 남북협상파의 의도는 좋았다. 하지만 소련과 김일성의 전술에 말려든 결과가 
되고 말았다.”

 
(중앙일보 2008년 7월 18일 ‘기로의 1948년 해방 후 5년의 선택이 대한민국
운명 갈랐다’)


글=정현진 기자 <correctroad@joongang.co.kr>
자문=중동고 최미정 역사 교사. </correctroa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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