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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128)

1905년 고종 친서 첫 공개

by 석암 조헌섭. 2015.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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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일본의 군림은 불법"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1905년 고종 친서 첫 공개

 
고종이 러시아 니콜라이 2세 황제에게 을사조약 석달 전인 1905년 8월 22일 보낸 친서.
‘한국 황제의 친서’라는 제목의 10장짜리 문서에서 고종은 "일본의 독립 말살 행위는 불법"
이라고 고발했다.

"대한제국은 4000년의 역사를 가진 독립국가인 반면, 일본은 1200~1300년대 들어 겨우
국가를 수립했다. 일본의 여러 풍습은 짐(朕, 황제가 스스로를 지칭하는 말)의 나라에서
유래됐으며, 글자도 짐의 나라 백성이 가르쳤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처럼 짐의
나라를 존경했으며, 짐의 나라와 감히 적대적 관계를 맺을 생각도 못했었다(중략)".


110년 전 대한제국 고종(1852~1919) 황제가 러시아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친서의 일부다.
친서를 쓴 날짜는 1905년 8월 22일. 을사조약을 체결(11월 17일)하기 석 달 전이다. 
친서는 일본에 글도 가르쳤고, 풍습도 전했음을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도 일본이 불법 침략을 했다고 고발하고 있다.


 "일본은 악랄하고 삼엄하게 짐의 나라 주권을 장악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가 이리도 슬픈 정황에 처한 원인은 국가가 허약해 방위도 할 수 없고,
권리를 지킬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렇다 해도 우리는 수차례에 걸쳐 독립국가임을 선포했다. 지금 일본은 확실히 짐의 나라에 군림해 독립을 말살시키려 하고 있으나, 불법인 것이다."


이 친서는 동북아역사재단 최덕규 연구위원이 제정러시아대외정책문서관에서 발견했다.
고종이 러시아에 친서를 보냈다는 기록은 있지만 친서에 담긴 내용이 공개된 건 처음이다.
본지가 최근 입수한 친서 사본은 ‘한국 황제의 친서’라는 제목의 10장짜리 문서다.

러시아어로 돼 있으며, 러시아 정부의 문서 정본임을 확인하는 도장이 날인돼 있다.
고종이 처음부터 러시아어로 된 친서를 보낸 것인지, 러시아 측이 한자를 번역해 보관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친서에서 고종은 "일본이 우리나라의 주권을 침탈하려는 음모를 꾸미지 못하도록
공사를 빨리 다시 파견해주시기를 눈물로 호소한다"고 했다.


최 연구위원은 "고종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해 9월 포츠머스 강화조약에서 러시아는
한반도에서 일본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한다. 대한제국엔 고종황제를 견제하는
친일내각이 들어섰다"며 "이때부터 고종은 개인, 비선조직을 통해 대외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결국 이 친서는 고종이 정부를 대표해 마지막으로 가동한 공식 외교채널이었다.
고종은 친서에서 "이천만의 국민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심지어 닭과 개들조차 짖지 않을 정도로 살 수가 없다"고 비통해했다.


 광복 70년을 맞아 망국의 시대에도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피눈물을 흘린
비운의 외교관들을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준비했다.
역사는 늘 교훈을 남긴다. 후손들은 그 역사에서 실패와 성공을 모두 배울 의무가 있다.

"한국 독립 지켜야 러·일 견제" … 영국 물고늘어진 이한응

입력 2015-08-12 02:16:08
수정 2015-08-12 03: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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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5월 16일자 영국 일간지 던디 이브닝포스트 5면에 ‘창가의 얼굴-한 외교관의
비극적이고 명예로운 고독’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기사는 이렇게 시작했다. "지난 몇 주 동안 그는 매일같이 공관 위층 창가 커튼
뒤에 서 있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조국을 생각하며 몇 시간씩 그 자리를 지켰다."

 ‘그’는 나흘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대한제국 주영 서리공사 이한응(1874~1905)이다.
 영국 외무성에는 지금도 이한응과 관련된 문서가 2권으로 보관돼 있다. 한반도의
운명에 관심했던 영국 정부로부터 무시와 냉대를 받으면서도 포기를 몰랐던 망국
외교의 기록이다. 

이한응은 1901년 3등 참찬관(지금의 3등 서기관)으로 영국 공관에 부임했다.
그는 신학문을 교육하는 국립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수학했고, 스무 살에 과거에도 급제했다.
1904년 초 서리공사를 맡아 ‘1인 공관’을 책임졌을 때 그의 나이는 서른 살이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뒤 러시아는 군대를 파견, 만주를 점령한다. 영국은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 일본과 손잡는다. 1902년 1차 영일동맹이다.
이한응은 영국 정부를 상대로 외교를 펼친다. 1904년 1월 13일 외무성을 방문,
자신의 정세 판단을 담은 장문의 메모를 전달한다.

1980년대부터 영국 외무성 외교문서를 분석해온 이화여대 구대열 명예교수가 최근
공개한 메모 사본에는 이한응이 친필로 그린 도표가 포함돼 있다.
이한응은 세계 정세를 영국·프랑스·일본·러시아를 네 꼭짓점으로 하는 사각형
구도로 묘사했다. 

그런 뒤 "영·프가 힘을 합쳐 러·일을 상호 견제하는 안정된 3각 구도를 만들어야 전쟁을
막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동아시아의 정치적 열쇠를 쥐고 있는 한국의 독립과
주권 보장은 필수"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당시 영국 외무성의 동아시아국 담당차관보
프랜시스 캠벨과 동아시아국 고위 관리(서기관 내지 참사관급) 월터 랭글리는
"영국의 동아시아 정책은 영일동맹에 기초한다"고 거부했다.

이한응이 계속 면담을 신청하자, 서면으로 접수하라는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구 교수는 "국제 정세를 잘 읽어 탁월한 견해를 내놨지만 이룰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미 한반도에서 일본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한 영일동맹과 러일전쟁이 가져올 우리의
운명은 뻔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1904년 말 일본이 대한제국의 해외공관 인원을 줄이려 하자 이한응은 영국 외무성에
"‘한국이 런던에 전권공사를 파견해주길 바란다’는 전문을 고종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캠벨은 "이 작은 음모 는 한국 대표부를 강화하려는 기도"라며 무시했다.

 1905년 2~3월 러일전쟁의 승기를 잡은 일본이 평화조약 체결을 논의했다.
이한응은 러시아가 일본의 한반도 점령을 용인할 것을 우려해 영국에 이를 막아달라는
각서를 전달했다. 하지만 영국 외무성은 "당사국 간 교섭"이라며 거절했다.

이한응은 자결하기 전날인 5월 11일 외무상 면담을 요청한 뒤 답변이 없자 목숨을 끊었다.
"오호라 나라의 주권 없어지고 사람의 평등을 잃으니 무릇 모든 교섭에 치욕이 망극할
따름이다. 구차히 산다 한들 욕됨만 더할 따름"이라는 유서를 남긴 채.

 주영 한국문화원의 폴 웨이디 연구원은 지난 5월 독립기념관 주최 학술대회에서 
"최근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견한 기록에 따르면 이한응은 죽기 전 암호로 된 전보를 파기했다. 5월 10일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영국이 용인하는 내용의 2차 영일동맹 초안이 교환됐는데, 
누군가 전보로 이를 이한응에게 알렸고 이한응이 절망한 나머지 자결을 결심했을 수 있다"고
밝혔다.

이한응의 시신은 고종의 명으로 본국으로 송환됐다.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해 순국 1호인 그의 추도회에는 수백 명이 모였다고 한다.
◆특별취재팀=유지혜·안효성 기자, 왕웨이 인턴기자, 김유진·송영훈 대학생 인턴기자 

 고종 "우리는 중립국가" 열강들 상대 친서·밀사 외교

입력 2015-08-12 02:19:26
수정 2015-08-12 03:07:33

고종은 망한 나라의 군주다. 그의 생 전체에 덧씌워진 불명예다. 하지만 학계에선 
을사조약을 전후한 고종의 외교를 재평가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친서 전달, 특사 파견, 비선 접촉, 국제기구 가입, 망명정부 구상 등 고종의 외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외교권 행사를 제약받는 상황에서도 현대 국가들이 사용하는 외교 수단들을 망라했다.

 ◆친서 외교=일본과 러시아의 갈등이 격화하던 1900년대부터 고종은 열강들에 한반도 
중립화를 제안하며 친서 전달이란 방법을 사용했다. 
1903년 11월 23일 고종은 "장차 러일전쟁이 발발하면 본국은 국외중립을 선언하겠다"고
선언했다.

러일전쟁 발발(1904년 2월) 석 달 전이었다. 이어 고종은 1904년 1월 16일
‘한국의 중립 선언’이 담긴 친서를 이탈리아 국왕 등 각국에 전달했다.
일본이 전신업무를 통제하고 있어 고종은 밀사를 중국 산둥성 즈푸로 보냈다.
여기서 프랑스 영사의 도움으로 각국에 친서를 발송했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조약 무효화를 주장하기 위해서도 친서를 활용한다. 
밀사 파견을 통해서다. 1905년 12월 시종무관 현상건을 러시아로 보내 
니콜라이 2세에게 주권 회복을 도와달라는 친서를 전했다. 

러시아는 런던·빈·로마·워싱턴·베를린·파리 주재 공관장들에게 
"을사조약이 불법임을 알리라"고 지시했으나 프랑스 말고는 대부분 일본 입장을 지지했다.
1906년 6월엔 국제재판소 제소를 도와달라는 친서를 조약 상대국 9개국 원수에게 발송했다.

 ◆국제기구 참여=구한국 외교문서에 따르면 고종은 1901년 스위스 정부로부터 
제네바 협정안을 입수한다. 전쟁이 날 경우 적십자사를 활용할 수 있다는 기대에서다. 
1902년 10월 주프랑스 및 주벨기에 공사 민영찬을 특파대원으로 임명해 적십자회의에
참석하라고 지시했다.

12월엔 가입 국서를 전달하고, 1903년 1월 가입 허가를 받았다.
국제기구 가입은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독립국으로서 인정받았다는 의미가 있다.
1905년 출범한 대한적십자사를 일제는 1909년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로 격하했다.

 네덜란드 만국평화회의 가입도 추진했다. 1903년 8월 민영찬을 통해 "가입을 서두른다"는 
친서를 네덜란드 대통령에게 보냈다. 
1904년엔 현상건을 특사로 파견해 만국평화회의와 헤이그 상설국제재판소를 방문하라고 
지시한다. 

하지만 평화회의는 개회 기간이 아니었고, 재판소는 휴정 중이라 담당자 접촉에 그쳤다. 
1907년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이준·이위종 등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것도 
이런 노력의 연장선상이었다. 이는 고종의 퇴위(7월 18일)로 이어졌다.

 ◆망명정부 구상=고종은 퇴위 뒤에도 항일 외교의 의지를 꺾지 않는다. 
1910년 6월 측근을 보내 러시아에 ‘연해주 망명정부’ 구상 계획을 전했다. 당시 상하이 
주재 러시아 상무관의 보고서에는 "고종은 도주(망명)하기로 마음을 굳혔으며, 
이범윤과 함경도 지역 의병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북쪽으로 혼자 도망칠 계획"이라고 
적혀 있다. 

1918년에는 독립운동 단체 신한혁명당 주도로 고종을 추대하는 망명정부 수립이 추진된다. 
하지만 1919년 1월 고종이 갑작스레 서거하며 무산됐다.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서울대 이태진 명예교수는 "고종은 유교 원칙에 입각해 우리가
성의를 다하면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식의 ‘신뢰외교’ ‘성실외교’를 펼쳤다"며
"후일 임시정부가 외교 활동을 펼칠 수 있는 토대가 됐다"고 평가했다.

고려대 현광호(한국사학) 교수는 "지나치게 외세의 보장에만 집착했다는 건 문제였지만
외국 외교문서 등을 통해 확인된 고종의 외교 활동량은 엄청났다"며 "거의 매일 대한제국
주재 외국 공사들을 만났다. 고종의 이런 노력들이 폄하된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유지혜·안효성 기자, 왕웨이 인턴기자, 김유진·송영훈 대학생 인턴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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