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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일지(121)/산행일지(118)

운문사

by 석암 조헌섭. 2012.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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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고카페 - 김성환 - 인생| 태크&노래방
사무총장 | 조회 621 |추천 0 | 2011.06.13.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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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97년8월3일

참석인원=28명

 

운문사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운문산에 있는 신라시대의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560년(신라 진흥왕 21)에

신승(神僧)이 창건한 절로 608년(진평왕 30)에는 원광법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크게 중창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 권4 원광서학(圓光西學) 및 보양이목조(寶壤梨木條)에

원광법사와 운문사는 관련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적기 寺蹟記〉에 따르면

고려시대인 937년(태조 20) 중국 당(唐)나라에서 법을 전수받고 돌아온

보양국사(寶壤國師)가

까치떼의 도움으로 이 절을 짓고 작갑사(鵲岬寺)라 했으나,

943년 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이 보양국사가 절을 세웠다는 말을 듣고 많은 전답과

 함께 '운문선사'(雲門禪寺)라고 사액한 뒤부터 운문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105년(숙종 10)에 원진국사(圓眞國師)가 중창한 이후로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으며,

조선시대인 1690년(숙종 16) 설송(雪松)이 임진왜란 때 폐허화된 절을 다시 중건하여 어느정도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현재 이 절에는 조계종 운문승가대학이 설치되어 많은 비구니들의교육과 연구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경내에는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규모가 큰 만세루(萬歲樓)를 비롯하여

대웅보전(보물 제835호)·

미륵전·작압전(鵲鴨殿)·금당·강당·관음전·명부전·오백나한전 등 조선시대의 많은

건물들이남아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금당앞석등(보물 제193호)·동호(보물 제208호)·

원응국사비(보물 제316호)·석조여래좌상(보물 제317호)·

사천왕석주(보물 제318호)·3층석탑(보물 제678호) 등이 있다.

 

 

 

운문사석조여래좌상

 

                                                      운문사석조여래좌상      

 

 

보물 제317호. 높이 불상 63cm, 대좌 41cm, 광배 92cm.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추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호분(胡粉)이 너무 두껍게 입혀져서 원래의 모습을 잘 알 수가 없다.

머리와 높다란 육계에는 나발(螺髮)이 표현되었고, 얼굴은 네모난 편으로 눈·코·입

등이 섬세하지 않고 조그마하게 처리되어 있어 부처의 위엄을 찾아볼 수 없다.

목부분은 거의 표현되지 않아 짧은 편이며

좁은 어깨에는 통견(通肩)의 법의를 걸쳤는데 옷주름선이 형식적이고, 밋밋한 가슴 위로는

 승각기가 표현되어 있다.

 두 손은 결가부좌한 무릎 위에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으나 불신(佛身)에 비해 손이 작고 조각기법이 정교하지 못해 투박한 느낌을 준다.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광배는 두광과 신광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연꽃무늬와 화염무늬가

장식적으로얕게 새겨져 있다.

대좌는 특이한 육각형으로 상대석에는 타원형의 앙련(仰蓮)이 조각되어 있고,

중대와 하대석은 1개의 돌로 만들어졌으며 특히 하대석에는 복련(覆蓮)이 돌아가면서

 표현되어 있다.

이 불상은 전반적으로 양감이 줄어들면서 평면성이 강조되어 있으며, 위축된 자세나

장식적인 광배 문양 및,대좌의 표현 등에서 시대가 다소 내려가는 통일신라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감로천

 

운문사  대웅보전 (보물 제835호)

 

대웅보전 벽화

 

운문사 대웅보전 벽화

 

 운문사 삼층석탑

 

운문사는 고려시대의 승려 일연이『삼국유사』를 저술하였던 곳으로, 지금도 절

안에는 3층 석탑을 비롯하여 석등, 사천왕석주, 원응국사비, 석조여래좌상 등의

문화재들이 보존되어 있다.

대웅보전 앞에 동·서로 서 있는 이 두 탑은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규모와 양식이 서로 같다.

각 층의 기단에 기둥모양을 본떠 새기고, 특히 윗층 기단에는 8부중상(八部衆像)을

새겨 놓았는데 모두 앉아 있는 모습이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처마 밑이 수평을 이루며, 밑면의 받침은 5단이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각 부분들이 차례로 올려져 있는데, 모두 본래의 것들이다.

기단의 가운데기둥이 아래층 기단에서는 2개이던 것이 윗층 기단에서는 1개로 줄어들고,

표면에 조각을 둔 점 등으로 보아 9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기단부가 몹시

부서져 무너지기 직전이던 것을 일제시대에 보수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큰 만세루(유형문화제424호)

 

 

원응 국사비(보물 제316호)

 

 

석조여래상(보물제317호)  사천왕 석주 (보물 제318호)

 

보물 제318호. 높이 제1석주 152cm, 제2석주 164cm, 제3석주 153cm. 4개의 길다란

석주에 사천왕상을 1구씩 부조로 조각했는데 부분적으로 채색을 칠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석주는 원래의 위치를 알 수 없고 그 용도도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각 상의 이름을

밝히기가 어렵다.

그러나 손에 들고 있는 지물에 의해 대체로 삼고저(三鈷杵)를 쥐고 있는 제1석주의

사천왕상은 남방의 증장천(增長天)으로 생각되며, 제2석주는 탑을 든 북방의

다문천상(多聞天像), 제3석주는 불꽃[火峰] 또는 꽃가지를 든 서방의 광목천상(廣目天像),

제4석주는 양손으로 칼을 받치고 있는 동방의 지국천상(持國天像)으로 추정된다.

 

이 사천왕상은 모두 원형의 두광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무인형(武人形)으로

악귀를 밟고 천의자락을 날리면서 서 있으며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또한 신체는 장대하지만 대체로 조각적인 양감이 줄어들었고, 서 있는 다리의 자세가

엉거주춤하며 갑옷의 띠주름이 굵어지고 세부표현이 정교하지 못한 점 등은 9세기경의

 통일신라 석탑이나 부도에 새겨진 사천왕상과 양식적으로 유사하다

 

 

 

 

사리암

 

 

     사리암 관음전

 

   사리암 대웅보전

 

  운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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