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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조씨 인물 ,족보(23)

덕양서원 삼선생 유적비문(원본)

by 석암 조헌섭. 2019. 9. 12.

 

양서원(德陽書院) 삼선생 유적비문(원본)

중추절을 맞이하여 내고향 합천(陜川), 덕봉(德峰)의 추억을 되새기며 이글을 올려본다.
저는 합천 박물관이 있는 쌍책면 덕봉리(昌寧曺家 집성촌)에서 태어나 
앞산엔 응봉산(鷹鳳山)과 뒷산 분대산(粉垈山) 장대가 걸리는 골짝 촌놈이다. 

1979년 봄 대구로 와 1945년 3월 5일 대구 부령에 의거 발족한 대명1동에 살고 있으며, 
1994년 4월 24일 지리산 천왕봉에서 대명1동에 거주하는 산행에 뜻있는 분과 부부동반 
대명동 대덕산악회를 발족하여 초대 회장(初代 會長 曺憲燮)으로 취임하여
 14대까지 내려오면서 29여 년간 300여 곳의 명산을 오르다 보니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어
 허물없는 이웃사촌이 되어 돈독한 정을 쌓아가고 있다. 

또한, 3~40년 전부터 매일 아침 5시에 출발하여 
1915년 1월 윤상태 서상일 이시영 등 13명이 이곳에서 목숨을 바쳐 국민 회복
운동을 할 것을 서약하고 비밀결사대[秘密訣死隊] 중앙 총부를
조직하여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을 하며 상해임시정부를 도우려고 군자금 조달 
운동을 벌인 
앞산 중턱 유서 깊은 사찰 안일사(安逸寺)까지 아내와 함께 갔다 오면
07시
 앞산이 고향만큼 정든 곳,
하루하루의 생활을 즐겁게 지인들과 술잔과 찻잔으로
보내다 보니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 대명동 생활이 40여 년이 지났다.

내고향 우리동내 덕양서원(德陽書院)은 1784년 정조 8년 갑진년 12월 1일 
 초대 원장(院長)
 노륜(盧掄) 유사(有司) 조석인(曺錫寅), 전택근(全宅謹) 등이
개원(開院)하여


1868년 고종 5년 무진년 4월 15일 마지막 113대 원장 전택립(全宅立),
 유사 곽진호(郭鎭祜), 유상극(柳尙極)마지막으로 84년간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으나
고종 5년 9월 대원군이 금령훼찰  미 사액서원(未 賜額書院) 을
철폐하여 그 후 덕양재로 개명하여
사용하다 2016년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덕봉리 덕양서원 삼선생 유적비 건립 일 2000년 5월 6일

2000년 5월 삼 선현께 제(祭)올리는 동민 모습

 
 
 
 
 
 
 
 
 
 
 
 
 
 
 
 
 덕봉마을의 유래

덕봉 마을은 청도 김씨가 살았었는데 1524년(중종19)에 창녕조씨(昌寧曺氏)
입향조(
入鄕祖)
선조가 기거(基居)하였다.

덕봉:마을회관 앞 정자나무는 500여 년전 식수되어 여름에 주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다. 

 마을입구에는 유황성분이 많은 지하수가 있어 마을 부녀자들의 빨래터로 이용되고 있었는데, 
지금은 온천수(溫川水)로 목욕탕으로 사용하고 있다. 

서원담:정와 조수천(靜窩 曺受天), 봉곡 조이천(鳳谷 曺以天), 정곡 조신천(靜谷 曺信天)
선생을 모신 덕양서원이라는 서원이 있었다 하여 서원담이라 부른다. 
덕양서원은 대원군 때 폐쇄되었고, 정곡선생의 필어집 36판은 현재까지 보관되어 묘사일인 
음력 10월 11일 제사가 거행되고 있다.

백정동:옛날에 잣나무가 많이 자생하였던 곳으로, 지금은 한 두집 남았지만, 백정동 가는길
옆에 봉곡 조이천(鳳谷 曺以天) 선생이 계정집을 집필한 정각이 있었고,
 묘소는 덕곡면 병배리 입구 덕곡사(德谷祠) 맞은편에 있다. 묘제일은 음력 10월 13일에
 묘제(墓祭)가 거행되고 있다.




내고향 = 경남 합천군 쌍책면 덕봉리 일부 (옛날 사진)
끈땀-뒷골땀-숲골땀-장방골-서원땀-백정 2개 부락으로되어있다.

























 봉곡선생 중건운시(鳳谷先生 重建韻詩)


봉곡 이천(鳳谷 以天) 선생은 1560년 명종 15년 경신년에 태어나
 남명조식(南冥 曺植) 선생 문하에서 글을 배워 덕업과 문장이 재보(宰輔) 재상(宰相)으로
 서의 인망이 있었고,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祐). 설학 이대기(雪壑 李大期).
뇌곡 안극가(磊谷 安克家). 당암 강익문(戇庵 姜翼文). 매죽와 노극성(梅竹窩 盧克成).
 도촌 조응인(陶村 曺應仁) 과 친하였다.
 
이천 봉곡(以 天 鳳谷)선생은 효심이 지극하여 백형 와 수천(靜窩 受天)공을 따라
 6년 동안 부모의 산소 아래에 여막을 짓고  여묘 생활을 하여  세상에서
 쌍효자산(雙孝子産)이라 일컬어지며 그 사실이 읍지(邑地)에도실려 있다.


저서로는 계정집(溪亭集)이 있는데 설학(雪壑)이공(李公)이 계정의 벽에다 쓰기를 
송백(松栢)과 지란(芝蘭)에  비교되는데 어찌 일찍이 부귀에 대하여 묻겠는가?


하늘가에는 구름이 떴다 없어졌다 하도다. 라고 하였으며 또 "계암에서 문을 닫고 있던
때에 흩어지고 남은 해묵은 서책 새롭도다, 하였는데 십분 진정한 면목을 이해하였다.고
 말을 할 수 있다.
현와 이공(鉉窩 李公)은 우리 존장의 그윽한 마음은 불 꺼진 재와 같은데 어떻게
 움직이는 주체가 되어 물가의 정자에다 드러내겠는가 ?
 
한가로운 구름은 끝없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건만 .들에 사는 학은 세상일 잊고 마음대로 오가도다,,라고 하였다.그 후 1741년 영조 17년 신유년에 사림(士林)들이 덕곡사(德谷祠)를 건립하여
 제향(祭享)하였다.


그리고 또 성균관 제주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이 묘갈명 을 지었는데 이르기를
'재능은 아름답고 학문은 깊어 하늘이 반드시 기용할 터인데, 발탁되지 않아도 화를
 내지 않으니 바로 현명하다고  할만하며  비석에 새기기에 적합하도다. 라고
 하셨다.


여기 석암 조헌섭(昔暗 曺憲燮)이 올리는 봉곡선생 중건 운시 는 1799년 정조 23년
 기미년에 봉곡선생의 후학(後學) 선비들과 후손 (後孫)  조기영(曺基永), 조철승(曺哲承)등
 41명의 시(詩)가 기록된 원본이다.




















































 


도곡 조병창(淘谷 曺秉昌) 



도곡 조병창(淘谷 曺秉昌) 전 뉴욕한인회장, ‘엘리스 아일랜드 상’ 수상

도곡 조병창 전 뉴욕한인회장, ‘엘리스 아일랜드 상’ 수상한 분은 저의 집안 叔(아재)이다. 초기 이민자로 숱한 고난과 역경(逆境)을 딛고 성공한 인물이다, 
경남 합천군 쌍책면 덕봉 출신인 조병창(曺秉昌) 제19대 뉴욕 한인회장이 
지난

 2013년 5월11일 미국 맨해튼 엘리스 아일랜드 이민 박물관에서 미국 
소수민족연대협의회(NECO)로
부터 ‘엘리스 아일랜드 상’ 수상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엘리스 아일랜드 상’은 1986년에 제정된 상으로 이민자, 또는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 미국 사회 발전에 기여한 지도자에게 수여되는 상이다.역대 수상자 중에는 지미 카터, 로널드 레이건, 빌 클린턴, 조지 H.W. 부시 등 전 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 노벨상 수상자, 사회활동가,  기업인 등이있으며 수상자 이름은 미 연방의회 상·하원의 기록에 남는다. 
도곡 조병창 회장은 1939년 쌍책면 덕봉리에서 태어나 1965년 문교부를 

시작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 1973년 미국으로 건너가 초기 이민자로서 숱한 고난(苦難)과 역경을 딛고  성공한 케이스이다.그는 뉴욕 한인경제인협회장, 뉴욕한인회장을 역임하는 등 40여 년을 전미주 동포 사회를  위해 헌신(獻身)하고 봉사함으로써 700만 해외 한인동포사회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조 회장은 1992년 한국어린이재단 뉴욕후원회장을 맡으며 10년 넘게 청소년 결연 사업을 추진했으며 북한 어린이를 위한 우유 보내기 운동, 이산가족 상봉사업 등 민족 화해 협력을 통한 평화정착과 공동 번영(共同 繁榮)을 위해서도 노력해왔다.



2007년에는 가족장학재단인 ‘조 파운데이션’을 설립하여 80여 명의 학생에게 7만 5000달러를
 후원하는 등 본격적인 장학사업(奬學事業)을 시작하기도 했다.
특히 2005년에는 합천군과 미국 버겐카운티와의 자매결연 체결을 추진하여 매년 관내 고등학생들에게 미국 어학연수의 기회를 제공하는데 일조하여 합천군 국제교류 명예대사로 위촉되기도 했다. 지금은 항공 세계물류센타를 운영하고 있다. 





덕봉리 덕양서원, 도곡 조병창(淘谷 曺秉昌) 공덕비


조현관 중부 국세청장은 조용한 성격 청장 취임


 
조현관



신중하고 조용한 성격이지만 뚝심있는 업무 추진력을 갖춘 전형적인 국세공무원
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합천 쌍책 덕봉이 고향이며
고 조병후(曺秉厚)님과 박여사님의 삼 남매 중 맞이로
1958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북고와 영남대를 졸업 고려대학교 정책 대학원에서 경제학석사를
받는 등 만학도 이기도 하다.

행정고시 25회에 합격해 국세청에 입문하였으며 헌법재판소 파견 목포 세무서장,지낸뒤
 중부국세청 조사2국2과장,서을국세청 법무2과장, 서울국세청 조사3국
3과장,국세청 납세보호과장 등으로 일했다.이후 요직인 국세청 감사 담당관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2006년 감사담당관 재직시절 세무사시험 오류라는 불의의 사태를 수습 하는데 일조하기도
 하였다.
2006년 부이사관으로 승진한 이후 제2의 고향인 대구로 내려가 대구국세청 조사2국장으로
 일하다  서울국세청 조사3국장으로 발탁되었다.
2010년1월 국방대학교 파견자로 선발 되었으며 1급으로 승진 중부 국세청장으로
일하고 있었다박근혜 정부때 국세청장 후보 1순위로 오르기도 하였다.



고향 추억
              석암 조 헌 섭

내 고향은 1524년부터 기거한
창녕 조(曺)가의 집성촌,
남명선생으로부터 학문을
전수받은
선현의 터전이라 
선현(정와, 봉곡, 정곡)의 
행적
자손대대 빛이 되니
 
옛 덕양서원 1784년
초대 노륜 원장님이 개원
1868년 113대 전택립 원장 때
대원군이 금령훼찰 
미 사액서원으로 철폐 당한
덕양서원 문화재로 등록됐네




500여 년 된 정자나무그늘은
동민의 휴식처,
병풍처럼 펼쳐진 분대산, 
해넘이 응봉산 정기 받아 
인정 많고 예(禮) 지키는
삼선현의 후손이라네
 
길가다 인사하면 밥 묻나
반갑게 맞아주던 
할배 할매, 아재 아지매, 형님 형수

지금은 고인이 되신 분도 많지만, 
고향 산천 변함없네 
 
고향 떠난 지 어연 반 백  
육십 중반을 지나 
고희(古稀)를 바라보니 
문득문득 철부지  
고향 생각 옛 생각에 잠겨본다.  
 
해마다 정월이면
농악으로 지신 밟고  
해인사로 진해로
밀양으로 창녕으로 방방곡곡  
축제장 전야제 농악 한마당
즐겼던 추억 아련하네.


2019년 중추절
석암 조 헌 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