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이야기

해웃값

by 석암 조헌섭. 2016. 10. 8.
728x90
반응형
웃값

대구의 명소[名所]인 두류공원이나 달성공원에 나가보면 많은 노인들이
바둑이나 장기를 두며 소일하고 있다. 그 수가 부지기수[不知其數]다.
옛날 같으면 모두 송장이 되었을 나이인데 현대 의술[醫術]이 발달하여
오래 살고 있다.

좋아해야 할지? 축복[祝福]해야 할지 쉽게 판단[判斷]이 서질 않는다.
그런데 이런 노인들 틈에 나이가 든 아줌씨(?)들이 소주나 박카스 등을
가지고 다니면서 팔고 있는 광경[光景]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고 노류장화[路柳牆花]도 아니다. 단지 늙은 꽃이다. 

늙어도 마음은 꽃이다. 하릴[어떻게 할 도리]없는 노구도 봉접(벌과 나비)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記錄]된 매춘에 따른 보너스는 고려시대 어느 임금이 
기생에게 자주 비단을 하사한 것이 시초[始初]라 한다.

당시 기생은 모두 국고로 월급을 주는 관기[官妓]였으므로 별도의 서비스
값이
필요 없었지만, 재주 뛰어난 기생을 포상하고 싶은 마음에서 국왕은 
특별비를 주었던 것이다.

기생들의 머리에 붉은 비단을 둘러주는 것으로 대표된 고려시대의 
기생에 대한 서비스값은 전두[纏頭]라고 했다.
조선조에서는 궁중 연회 후 기생과 광대들에게 약간의 쌀을 주는
관습[慣習]이 일반 양반님들까지 널리 퍼졌다.


해웃값이라는 것인데, 기생이나 창녀들과 상관하고 그 대가로 주는 돈이다.
비슷한 말로 화대, 화채, 꽃값, 놀음차 등이 있었는데 모두 같은 말이다.
해웃값은 해우[解憂]의 대가라는 뜻인 모양이다.

절간에서 화장실을 해우소 [解憂所]라 부르는 것과 같이 근심을
풀어준 데
대한 사례금이다.

이 해웃돈은 돈 만지기를 삼가하는 사대부들이 젓가락으로 동전을 집어 
기생에게 주었으므로  ‘젓가락 돈’ 놀아준 데 대한 대가로 준다 하여 
‘놀음차’ 라고 했다.


인류 초기의 매춘은 매우 신성한 행위[行爲]였다고 한다.
고대인은 여성을 신의 소유물이라고 믿었고, 여성을 취하는 것을 신에게
봉사[奉仕]하는 종교적[宗敎的] 행위로 보았다고 한다.

동양에서의 매춘[賣春]은 한나라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조정에서
홍등가[紅燈街]를 설치한 것이 그 시초라 한다.
이처럼 매춘은 가장 오래된 인류 문화의 하나이며,
정치적 종교적 영향[影響]
에서 명맥을 유지해 왔다고 한다.


소슬바람과 함께 줄비 내리는 주말 오후 
해웃값이나 준비해서 친구와 저잣거리에 나가볼까나!

2016년 秋
석암 조 헌 섭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수회의록[禽獸會議錄]  (0) 2016.11.12
관창서[官倉鼠]  (0) 2016.10.24
해괴제[駭怪祭]  (0) 2016.09.25
지지지지(知止止止)  (0) 2016.09.20
북한의 핵실험[核實驗]  (0) 2016.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