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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128)

김우옹

by 석암 조헌섭. 2013.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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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옹 일대기

김우옹1540∼1603)의 자는 숙부(肅夫)이고, 호는 동강(東岡)이며,
본관은 의성(義城)으로 성주(星州)에 거주하였다.
 그는 1540년 (중종 35년, 경자) 성주 사월곡(沙月谷)에서
칠봉(七峯) 김희삼(金希參)과 청주 곽씨 사이에 4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문집은 (동강집(東岡集)이 있다.
15세 때(1554년, 갑인) 성주교수로 있던 남명선생의 문인 오건에게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18세 때(1557년, 정사) 박찬(朴澯), 정구(鄭逑), 송사이, 김면(金沔), 이린,
    이홍량(李弘量), 이승(李承), 이기춘 등과 더불어 강학논도(講學論道) 하였다.

19세 때(1558년, 무오) 식년 진사에 제1등으로 합격하였고,
20세 때(1559년, 기미) 당시 남명선생의 문인인 곽율, 정구(鄭逑), 배신(裵紳) 등과
     도의로 교유하였다.

22세 때(1561년, 신유) 최영경, 이조, 오건, 하항(河沆), 유종지 등과 더불어 서로
    오가며 강마하였다.
24세 때(1563년, 계해) 겨울에 남명선생을 찾아 뵙고 제자가 되기를 청하였다.
     이 때 남명선생은 김우옹에게 이르기를, '남이 한 번만에 잘하게 되면 자기는
     백 번을 하고, 남이 열 번을 하여 잘하게 되면 자기는 천 번을 하여 잘하겠다는 
     생각으로 공부를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같은해(1563년, 계해) 정구(鄭逑), 박성(朴惺), 노흠(盧欽), 김면(金沔),
   배신(裵紳),  이기춘(李起春) 등과 더불어 도의로 교유하였다({濯溪集}).

25세 때(1564년, 갑자) 7월부터 남명선생을 모시고, 노진, 오건 등의 여러
동학과 더불어 덕산사(德山寺), 지곡사(智谷寺), 환아정(換鵝亭), 남계서원 등을
두루 다니며 자연을 음미하며 호연지기를 길렀다.

 이어 차고 있던 방울을 주면서 맑은 소리를 듣고 마음을 경계하도록 하였으며,
뇌천(雷天)이란 두 글자를 써 주면서 '대장(大壯)'의 마음을 가지도록 하였다.

산천재에서 김우옹이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이광우가 퇴계선생을 만나고 난 후 산천재로 찾아와 서로 만나 학문의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광우가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튿날 강익, 김우옹, 정복현, 도희령, 정유명, 임희무 등이 잇달아 이르렀다.
멀고 가까이 있는 선비들이 소문을 듣고 구름처럼 모여서 여러 날 동안 학문을
강론하였다.'고 한다.

26세 때(1565년, 을축) 가을에 박찬, 정구(鄭逑)와 더불어 서로 명리(名理)에 대해
      여러 날 강론하였고,27세 때(1566년, 병인) 봄에 남명선생을 모시고
     노진, 강익 등과 산청(山淸)의  지곡사에 모여 여러 날 동안 자연을 완상하며
     시를 읊었다. 
     선생께서 지곡사에 이르니 오건이 노진을 맞이하여 와서 뵈었다.

       이때 1566년 5월 13일에 강익(姜翼), 노관, 양죽암, 김우굉(金宇宏),
     
이정(李楨), 하항(河沆), 노진, 강익, 정유명, 정구(鄭逑),
     조종도, 이광우 김우옹 등의 제현들과 더불어 남명선생을 모시고
     단속사(斷俗寺)에서 산천재로 모였다.

 27세 때(1566년, 병인) 한양에 과거보러 갔다가 퇴계선생에게 나아가 잠시
    학문을  익혔으며, 어머니께 문안드리러 함양으로 내려왔는데,
    맏형 이계 김우홍이  함양군수로 있었기 때문이다.

28세 때(1567년, 정묘)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고향에 있으면서 사월곡 동남쪽에 동강정사(東岡精舍)를 세웠으며,
    이 때부터 호를 동강(東岡)이라고 하였다. 
    이 해에 이대기가 최영경을 따라 남명선생에게서 배웠는데,
    이 때 김우옹도 함께 공부하였다({雪壑先生文集}).

30세 때(1569년, 기사) 봄에 이정(李瀞)이 남명선생을 뵈러 찾아 왔는데,
   이 때에 최영경 등과 더불어 (심경)공부를 하였다.
   퇴계선생에게 예(禮)에 관한 의문을 글로 써 보냈다.
   문익성, 정구(鄭逑) 등과 더불어 학문을 강마하였고,

김우홍은 군수로 있으면서 평소 교분이 두터운 지역 선비 강익 등과 남계서원의
창건에 힘을 쏟았다. 
여름에 남계서원에서 오건, 노진, 강익 등과 학문을 강독하였다.

이 때 김우옹은 심성(心性)을 의인화하여 {천군전(天君傳)}이라는 소설을 지었다.
 왜냐하면 남명선생이 [신명사도(神明舍圖)]를 짓고 이를 바탕으로 김우옹에게 
(천군전)을 짓게 하였기 때문이다.(東岡年譜). 

32세 때(1571년, 신미) 홍문관에서 선배들이 면신례(免新禮: 새로 부임한
    벼슬아치가 전부터 있는 관원들에게 하는 일종의 신고식)를 행하려고 하자,
   이는 선비들이 할 바가 아니라고 하면서 불복하고 돌아왔다.
   겨울에 스승 남명선생이 병이 나자 수개월 동안 직접 간호하였다.
33세 때(1572년, 임신) 2월에 남명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렀으며 [언행록]과 [행장]을 지었으며,

34세 때(1573년, 계유) 8월에 선조의 부름을 받고 조정에 나아가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자, 9월 21일에 홍문관정자로서 사정전(思政殿)에서
    조강(朝講)을 하였다. 이 해 11월에 홍문관 부수찬으로 경연을 참석하여
     퇴계선생의 시호(諡號)를 청하였다.

선조(宣祖)는 경연에서 김우옹에게 "그대는 일찍이 조식의 문하에서 수업을
받았으니 반드시 들은 바가 있을 것이고, 또한 그대의 학문하는 것이 독실하니
마땅히 평일에 공부하는 도를 진언하라." 고 하였다.
35세 때(1574년, 갑술) 왕명으로 [성학육잠(聖學六箴)]을 지어 올렸다.
     송나라의 학자 장식, 명나라의 학자 설선의 문집을 간행할 것을 청하여
     이의 실현을 보았다.

    같은해 부수찬으로서 경연에서 요순우탕의 심법을 역설하여
    유교적 정치이념과 위정자의 정치도의를 밝히는 한편, 주경공부를 논하여
    왕의 정신수양의 원리를 강조하였다.

37세 때(1576년, 병자) 부교리가 되고 이어 이조좌랑, 사인 등을 지냈고,
40세 때(1579년, 기묘) 부응교가 되어 붕당의 폐를 논하였다.
  이 해에 사가독서하도록 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41세 때(1580년, 경진) 선위사로 일본 사신 겐소(玄蘇)를 맞이하였는데,
    사신의 접대에 여악(女樂)을 금지하도록 진언하였다. 
43세 때(1582년, 임오) 홍문관직제학이 되었고, 이듬해 대사성이 되고,
    대사간이 되었다.

48세 때(1587년, 정해) 안동대도호부사에 임명되어 백성을 사랑하고 학문을
     진작시키는 것을 백성 다스리는 기본으로 삼았다.

50세 때(1589년, 기축)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정여립과 남명선생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하였다는 이유로 함경도 회령부로 귀양을 갔다.

51세 때(1590년, 기축) 적소에 있으면서 작은 재실을 짓고 이름하여 완재(完齋)
    또는 성건당(省愆堂)이라고 하였다.
    4월에 형인 개암 김우굉의 부음을 듣고 제문을 지었다. 

   그해 겨울에 {속자치통감강목(續資治通鑑綱目)을 편찬 하였다.

53세 때(1592년, 임진) 5월에 귀양에서 풀려나 의주 행재소로 가서 승문원제조로
    기용되고, 이어서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1월에는 임금이 있는 의주에 도착하여 부호군의 벼슬을 제수받고 이어 왜적을
    막을 방책인 [기무칠조(機務七條)]를 임금에게 올렸다. 

   김우옹은 임란 중 임금을 호송하며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일 등 난세를 당하여
   신하로서의 도리를 다하였다.

54세 때(1593년, 계사) 명나라 찬획 원황의 접반사가 되고, 이어 동지중추부사로
    명나라의 경략 송응창을 위한 문위사가 되었으며, 왕의 편지를 명나라 장수
   이여송에게 전하였다. 그 해 상호군을 거쳐 동지의금부사가 되어
왕을 호종하고 서울로 환도하여, 한성부좌윤, 혜민서제조 등을 역임하였다.

55세 때(1594년, 갑오) 대사성이 되어 이어서 대사헌, 이조참판을 역임하였으며
60세 때(1599년, 기해) 관직을 병으로 사직하고 인천에 소요정(逍遙亭)을 짓고
     은거하였다.

64세 때(1603년, 계묘) 봄에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했으나 불허되었고,
     2월에 대호군에 불렀으나 병으로 사임하고 정좌산으로 돌아왔다.
    여름에 다시 불렀으나 나아가지 못하고 11월에 병으로 자리에 누워 9일에
     청주 정좌산 아래 우사(寓舍)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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