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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일제 문화 잔재

by 석암 조헌섭. 2015.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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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문화잔재 

만경강, 영산강 (지명)] 제안자 : 조법종

일제의 식량기지정책 시 사수강과 사호강을 각각 만경현, 영산포구에 예속된 만경강,

영산강으로 일제가 개칭해 현재에 이름
ㅇ 선정사유
일제는 식민지배를 원활히 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모든 부문에 걸려 일본식 용어의

사용을 강제하면서 이를 제도화 해나갔다. 특히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역사성과
전통을 완전히 무시하고 편의적으로 지명을 개정하였다.

현재 우리 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교과서에도 일제의 잔재가 상당수 남아 있다.

특히 지리
 교과서에 그 잔재가 많이 남아 있다. 

먼저 반도(半島)라는 말이 있다. 반도는 반쪽의 섬이라는 뜻으로 일제가 쓰고

자기네는 온섬(全島)이라고 했다 한다.
또 산맥(山脈)이라는 말도 우리의 조상이 사용하던 말이 아니고 우리가 일제가

사용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쓰고 있는 용어라 한다. 

<어린이 노래 및 놀이 (문화예술)>
ㅇ 제안내용
우리 어린이 놀이인 기러기 놀이, 동대문 놀이, 모래 놀이, 줄넘기 놀이, 사람빼어오기

놀이 등과 여우야여우야, 신데렐라 등의 노래는 일제강점기에 보급된 것들.
일제의 정서 속에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자라도록 보급해 일제문화에 익숙하도록
펼쳤던 식민교육임.

어린아이 놀이 가운데 쎄쎄쎄는 일본어 '손을 마주대다’라는 뜻의 "셋스루"에서

생겨난 말로 손을 서로 맞잡고 せっせっせ(쎄)'하는 것은 '(놀이,게임 등등의)
준비동작' 이라는 뜻. 구리구리는 일본말 くり-くり(작은 물건이) 가볍게 움직이는
[돌아가는(동사는 굴리다)] 모양. 획획. 빙빙,빙글빙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



1939년 만들어진 '감격시대'(강사랑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는 '환희'와 '사랑',
'청춘', '정열', '봄희망', '행운' 따위 말들로 구성된 경쾌하고 활기찬 노래이나 1939년에
 일제의 강제수탈이 최고조로 올라갈때 일제의 보급 권장 가요였음. 청춘과 정열,
봄희망 등은 우리의 독립을 노래한 것이 아니며,


여기서 말하는 환희와 휘파람은 일제의 승전에 의한 기쁨이고 징용과 징병으로 끌고가는
우리 청년들의 사기를 높이는 데 이용되었음. 1941년 만들어진 '복지만리'
(김영수 작사.이재호 곡.백년설 노래)는 가사만 얼핏보면 고구려의 기상을 살려 드넓은
대륙 만주 땅을 회복하자는 '국수적 민족주의자'들 노래같기도 하나


 고려 영화사와 만주 영화협회가 제휴하여 만든 일제의 만주 이주 정책을 장려하는
국책 영화 '복지만리'의 주제가였음. 영화의 내용은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의 생활을
소재로하여 선만(鮮滿)일체에 따라 두 민족의 정신적 융합을 꾀하는 것이라고 함.

벚나무는 일본을 상징하는 나무로써 일제는 우리의 정신을 앗아가고자 대표적으로

우리나라의 궁궐에 심어놓은 저의가 있음. 일제는 전국의 곳곳에 도시미화용으로
벚나무를 심어놓았다지만 그 이면에는 전국의 명승지,


임진왜란 당시 그들의 전승지, 새학교, 새도로 등을 그들의 국토로 인식하고
민족정신마저 식민지화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음.
이 외 관공서와
 공공장소의 벚나무를 무궁화 및 과실수로 대체하고 기타 왜식물도 정리할 필요가 있음

19세기 말 경 일본에서 들어온 놀이문화인 화투는 4장씩 12달을 상징하는 각 그림들은

 철저하게 일본의 전래풍속과 밀접한 관계 있음. 놀이에 쓰이는 용어 또한 일본말 다수.
국민에게 우리나라 고유의 '투전'을 부활시켜 보급하거나,
화투의 그림이나마 왜색을 배제한 새로운 그림으로 고치는 방안을 제안.

인감제도는 1914년 7월 조선총독부령 제100호에 의거 인감증명규정 제정 공포로

도입된 일제시대의 잔재. 일본은 국권 침탈 이후 토지개혁 작업을 하면서
인감을 가지고 신고하지 않을 경우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는 토지수탈 작업에 이용하는
한편 전쟁동원 물자 조달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이 제도를 이용했음.


인감증명제도는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일본과 대만 등에도 있었지만
이들 나라에서 등록제로 바뀌면서 현재는 전 세계적으로 우리나라밖에 없음.
 정부나 금융기관 등 관련 당국의 적극적인 정책개선이 요청된다.

ㅇ 제안내용
안압지와 사천왕사지, 김유신 장군릉과 무열왕릉, 아래에는 중앙선 기차 터널이 뚫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상상할 수도 없는 이같은 만행은 일제가 지기를 끊어 놓기 위해 철도를
 개설하면서 만든 것이다

정동의 대법원터에는 1895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재판소인 평리원(한성재판소)이

 있었는데 평리원은 공평동 부근에 신축 건물을 세우고 이전한 후 옛 평리원 건물은 조선
 총독부 조사국 분실로 사용되어 옴. 1926년 6월 다시 정동 옛 평리원의 터에 이른바
 '경성 재판소'를 세우기로 하고 일본인의 설계에 의하여 1927년 착공되었고 공사는
 타다구미(多田組)가 맡아서 했음. 1928년 준공된 청사는 일제치하 당시의 대법원격인
 조선고등법원과 경성복심법원청사로 출발하여 광복 이후 대법원으로 사용하기 시작해
 현재에 이름.

송광사의 경내에 있는 ‘보조국사감로지탑(普照國師甘露之塔)’은 지눌의 부도탑인데,

 탑에 오르는 계단 양식과 어울리지 않는 높은 사각 기단 등이 왜색이 짙음. 감로탑의
 조성시기를 밝혀주는 비에는 의도적으로 몇 글자를 쪼아낸 흔적이 있고 
소화(昭和)란 일본 연호가 남아 있으며 비석머리에도 일본 왕실 문양인 국화꽃을 새겨
놓아서 감로탑은 몰라도 다른 석조물은 일제시대에 조성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음.

서울시청의 맞은편의 서울시의회 건물은 일제가 1930년대 명목상 민(民)을 위한 관(館)을

 세우기로 계획하면서 지음. 흥천사(興天寺)라는 오랜 문화유산을 무너뜨리고 그자리에
 부민관을 세운 것으로, ‘민’을 위한 ‘관’ 역할이 아닌 상류계급을 위한 시설로 활용되었음.
 일제가 조선 지배의 목적으로 지은 이 건물이 광복 이후 국회의사당,
세종문화회관 별관으로 용도가 바뀜. 지자체 실시 이후 서울시의회가 들어옴.

소록도의 역사는 일제하 1917년 조선총독부가 움막 생활을 하며 걸식하는

한센병 환자 100여 명을 강제 수용하기 위해 '자혜의원'을 설치한 것으로부터 시작.
이후 강제노역과 병으로 인한 고통, 일제의 끊임없는 고문이 자행됐음.
지금도 식민지 시대의 가슴 아픈 잔재인 신사,
 감금실, 식량창고, 구교도소, 납골당 등이 그대로 남아있음.

목포의 유달산의 전망대 난간 너머 일등바위에 새겨진 왜색짙은 암각화 ‘부동명왕상’과

 ‘홍법대사상’은 일제가 일본불교의 전파를 위해 새긴 일제의 흔적으로 일본인 관광객들이
 참배하고 가는 곳이기도 함.


일제시대 유물은 가까운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전주초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독립기념탑. 독립운동을 기리는 취지에서 세워진 독립기념탑이 일제 잔재물로 지목되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독립기념탑의 기단부가 바로 일제의 잔재물이다.

‘봉안전’은 ‘어진영’이라 지칭되는 천왕 사진을 보관하는 건물이다.

이것은 학교마다 배치돼 학생들이 일본 천황의 얼굴을 기억하게 하고 일본식민주의
정신을 교육하는데 이용됐다.
 다음으로 전주시 중화산동에 있는 작은 산인 다가산의 호국영령탑에는
전주신사의 흔적이 남아있다.

유치원이라는 이름은 국민학교와 마찬가지로 일제 시대에 붙여진 이름이고,

시대 정신에 맞지 않은 명칭. '유아학교'로 개칭 요망.
우리말로 직역할 때 어린이 정원이란 표현이 가능하다.

 
황병기 심사위원장 소감
  일제문화잔재가 완전히 극복될 수 있도록 끈기 있게 역사문화운동을 추진할 것을
약속드리면서 다시 한번 국민 여러분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오염된 민족문화를 온전히 복원하고 한 단계 발전시키는 역사문화운동을

벌여나가야 할 것이다
                                                             2005.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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