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裵紳) 배신(裵紳, 1520∼1573)의 자는 경여(景餘)이고, 호는 낙천(洛川)이며, 본관은 성주(星州)로 현풍(玄風)에 거주하였다. 그는 1520년에 아버지 참봉 사종(嗣宗)과 어머니는 밀양 박씨 동선(東善)의 딸 사이에 태어났다. 그에 관한 자료는 {낙천일고(洛川遺稿)}가 있다.
남명선생에게 급문하여 질의한 것이 많았는데, 남명선생과 엄자릉의 도(道)에 대해 묻기도 하였다. 남명선생은 그에게는 나아가 벼슬할 것을 권하였고, 덕계 오건에게는 물러나기를 권하기도 하였다.
7세 때(1526년, 병술) 같은 고을에 사는 김렬(金烈)에게서 배웠다.
11세 때(1530년, 경인) 이제신[陶丘], 김범, 金禧年, 여응구 등과 더불어 벗을 삼아 친하게 지냈고,
40세 때(1559년 기미) 당시 남명선생의 문인인 곽율, 정구(鄭逑), 김우옹 등과 더불어 도의(道義)로 교유하였다.
42세 때(1561년, 임술) 식년 진사에 제2등으로 합격하였다.
44세 때(1563년, 계해) 김우옹, 정구(鄭逑), 박성(朴惺), 노흠, 김면, 배신, 이기춘(李起春) 등과 더불어 도의로 교유하였다.
46세 때(1565년, 을축) 관천(館薦)으로 남부참봉(南部參奉)에 제수되었고, 경기전참봉, 빙고별좌를 거쳤다. 53세 때(1572년, 임신) 동몽교관이 되어 학도들을 가르쳤다. 그에게 종학하는 사람이 많아서 강소(講所)에 다 수용할 수가 없었다.
실록의 기사에 의하면, 1632년(임신) 10월 13일에 고령(高靈)에 사는 전 참봉 이현룡(李見龍) 등이 상소하여, 선사(先師) 신(臣) 배신(裵紳)을 포상하고 이름을 기록하여 선비를 숭상하는 도를 중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대해 예조가 회계하기를,
"배신의 학문과 덕행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선배들이 있긴 합니다마는, 그가 죽은 지가 오래되어 그의 학행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알기가 어려웠다.
지금 그를 사모하는 문하생과 후학들이 대궐 앞으로 나와 상소를 올려 조정에서 포상의 은전을 내려주기를 바라고 있다. 들이 선사(先師)를 위해 세상에 드러내려고 한 정성은 가상합니다마는 포상할 만한 근거가 없고 또 그가 후세에 남긴 글도 없어서 그가 실천한 행적을 상고하여 확인하기가 어려우니, 그에게 특별한 은전을 추증하기란 경솔히 의논할 수 없다.
잠시 중외(中外)의 공론이 하나로 모아지기를 기다렸다가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합당하겠다."라고 하였다. 54세 때(1573년, 계유) 벼슬을 버리고 고향 현풍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노수신(盧守愼), 허엽(許曄) 등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겨울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별사(別祠)에 봉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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