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최부잣집 몸을 닦는 육연(六然)과 집안을 다스리는 육훈(六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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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최부잣집 몸을 닦는 육연(六然)
1. 자처초연(自處超然) 스스로는 초연하고
경주 최부잣집 집안을 다스리는 육훈(六訓)
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 1대 최진립 최부잣집은 12대 중, 9대의 만석에다 9대의 진사가 나온 셈이다. 이 집안에서는, 벼슬이 높아질수록 당쟁에 휘말릴 확률도 높고 감옥이 가깝다는 사실을 통찰하고서, 경제력 하나만으로 수신제가하여 국가사회에 이바지하는 것으로 사람의 도리를 다하겠다는 포부인 듯하다.
2. 재산은 만석 이상을 모으지 말라 4대 최의기 두번째 철학은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신념이 철저했다. 대체로 당시의 소작료가 수확량의 70% 정도였는데, 최부잣집은 50% 이하로끌어내렸다. 소작료가 저렴하니까 소작인들이 앞을 다투어 최부잣집 농사를 지으려고 줄을 섰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팠지만 최부자가 논을 사는 데는 박수를 쳤던 것이다. 최부자가 논을 사면 자기들도 상생의 이치로 먹고 살기가 나아졌기 때문이다.
3, 과객은 귀천을 구분하지 말고 후하게 대접하라 4대 최의기 과객들이 묵고 가는 사랑채에는 독특한 쌀뒤주가 있었다. 두손이 겨우 들어가도록 입구를 좁게 만든 뒤주였는데, 누구든지 두 손을 넣어서 쌀을 가져갈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과객들을 통해 최부잣집의 높은 덕망이 전국으로 퍼져 나갔던 것이다.
흉년이 드는 해면 수 천명씩 굶어 죽어가는 때였다. 가난한 사람들이 당장 굶어죽지 않기 위해 헐값으로 내놓은 전답을 매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죽빼미논’까지 등장하기도 했는데, 죽 한 그릇을 얻어먹고 논 한 마지기를 내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부잣집은 이런 짓이라곤 꿈에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실로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건을 살때도 언제나 일찍 제값을 주고 샀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제일 좋은 물건을 먼저 최부잣집으로 가져왔다. 최부잣집과 이웃들 사이에는 그만큼 신뢰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5,가문에 시집온 며느리들은 3년동안 무명옷을 입도록 하라 6대최종률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동안 무명옷을 입어야 하는 원칙을 지켜왔다. 부잣집 자부들의 근검절약과 이웃에대한 배려가 매우 철저했던 것이다. 보릿고개 때 새댁들은 쌀밥을 먹지 않고, 은수저도 사용하지 않았다. 검소하게 옷을 누덕누덕 기워입고 하수인들과 함께 부엌일을 했다. 시키기만 하는 게 아니라 함께 일을 했던 주인들의 자세로 익어졌다.
6,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3대 최국선 최부잣집의 사랑채는 한꺼번에 백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그래도 방사가 모자랄 때면 주위의 소작인들 집으로 식량과 반찬을 보내어 숙식을 제공해 주도록 하고, 대신 소작료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것이 마치 우애로운 한 집안 같아서 참 훈훈하게 느껴진다. 최부잣집의 한 해 식량의 소비량이 대략 3000석이었는데, 1000석은 식구들 양식으로, 1000석은 과객들의 접대로, 나머지 천석은 100리 안 이웃들을 돌봐줄 몫이었다.
*12대 최부잣집의 계보* 1대. 최진립(1568~1636) 경주최씨 시조인 최치원의 17세손. 임진왜란때 의병을 모아 크게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다시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대왕은 남한산성에 피신하고 있을 때였다. "대왕께서 포위당하고 계신데 늙은 신하가 살기를 도모하겠는가" 예순 아홉의 최진립은 임금이 계신 남한산성을 향해 군사를 몰아갔다. 모든 장수들이 퇴각했지만 최진립은 끝까지 항전을 결심한다. 그리하여 1636년 12월 27일, 정무공 최진립은 장렬히 순국했다. 2대. 최동량(1588~1664) 새로운 농법을 개발하고 식산을 장려하여 크게 부의 터전을 일구었다. 3대. 최국선(1616~1657) 비로소 만석꾼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또한 왕실의 제례주를 사가에서 처음 빚었으니 오늘날의 경주법주가 되었다. 부의 축적은 비록 합법적인 방법일지라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가진 자와 못가진 자가 서로 힘을 모아 함께 살아가는 길을 택하기로 한다. 마침 삼남지방에 흉년이 들어 무수한 사람들이 굶어죽어 가고 있었다. 최국선은 과감히 곳간을 풀어헤친다.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다짐한다,굶주린 이에게는 밥과 식량을, 헐벗은 이에게 옷을 건네주며, 그러면서 그때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을 세우게 된다. 4대. 최의기(1653~1722) 드디어 만석의 재산을 이뤄냈다. 5대, 최승렬 6대. 최종률 7대. 최언경 8대. 최기영(1768~1834) 지금까지의 내남면 이조리에 머물렀던 최부자의 종가를 당시의 교촌(지금 경주시 교동의 요석궁터)으로 이주한다. 9대. 최세린 10대. 최만희 11대. 최현식 12대.최 준(1884~1970)느닷없는 한일합방(1910년)으로 나라를 잃게된다. 최현식은 당시 20대인 최준에게 살림을 넘긴 후, 출입을 끊고 매일 아침북쪽을 향해 곡을 했다. '조선국권회복단'에 경주군 대표로 활동하며 자금을 대다가 투옥되기도 한다. 다시 백산 안희제를 만나 백산상회를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해 오다가, 드디어 1945년, 꿈에도 그러던 광복을 맞이했다. 400년을 이어온 부를 이제 영원히 보존할 길을 찾아 고심하던 끝에 육영사업에 전 재산을 내놓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최준은 만석지기 토지와 살고 있던 집까지 모조리 학교재단으로 희사한다. 당시는 대구대학이었으나 숱한 우여곡절을 거쳐 지금의 영남대학교로 성장한 것이다.
해방이 되었으니 일경의 감시도 없고 전 재산을 희사했으니 도둑 들 일도 없어서 이제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살겠다는 말을 남긴 채 최준은 1970년 10월, 마지막 최부자의 막을 내리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희사--댓가를 바라지 않고 기꺼히 내놓는다는 뜻인데 나라와 겨레의 장래를 위해 전재산은 물론 살림집까지 내놓은 그 고귀한 뜻이랑 만석꾼보다 독립유공자 자손으로 받는 25만원의 연금이 더 자랑스럽다는 후손들..... 이제 최부잣집은 우리들 기억 속에 고이 간직되었다가 우리 함께 복을 누리는 그런 세상이 오기를 학수고대 기다려 보아야겠다.
13년 10월 4일 조헌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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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통령 보관 기록물
노무현-820만여 건
이명박-48만여 건
2,005년 스크램해놓은 것을 올려봅니다. 정치적으로 보시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았으면 합니다.
이승만 3,847건, 박정희, 26,017건, 최규하 886건, 전두환, 14,181건, 노태우 3,826건,
김영삼 4,206건 현재 정부기록보존소에 보존되어 있는 대통령기록물.
전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에 보존된 자료와 정부기록 보존소에 있는 대통령 기록물
숫자가 다른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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