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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124)

성암 김효원(省菴 金孝元)

by 석암 조헌섭. 2012. 3. 19.

성암 김효원(省菴 金孝元)

 
김효원(金孝元, 1542∼1590)의 자는 인백(仁伯)이고, 호는 성암(省菴)이며,

본관은 선산(善山)으로 경성(京城)에 거주하였다.

현령(縣令)을 지낸 김홍우(金弘遇)의 아들이며, 그의 문집은 {성암집(省菴集)}이 있다.

그는 어려서 남명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정구(鄭逑), 김우옹과

더불어 퇴계선생의 문하에 들어갔다. 

 

23세 때(1564년) 식년 진사에 제3등으로 합격하였고

24세 때(1565년) 알성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26세 때(1567년) 호조좌랑이 되었고, 실록의 기사에 의하면

     참판 윤옥(尹玉)이 사은사로 북경에 들어갈 때 김효원이 서장관(書狀官)이 되었는데,

     김효원은 곧 윤옥의 동리(同里) 소년이었다. 

 

     윤옥의 처음 생각에는 김효원이 자세히 따지지 않을 터이므로 자기의 욕심을 달성시킬 수

     있을 것이라 여겼는데, 출발한 날로부터 윤옥의 남행(濫行)을 옆에서 하나도 따라 주지 않았다.

     윤옥의 자제(子弟)들이 싸 보낸 많은 은냥(銀兩)은 다 윤가(尹家)의 부탁에 의하여 궁중에서

     유출되어 김효원의 행동을 보고 그 욕심을 달성시키지 못할 줄 알고는 중도에서 되돌려 보냈다.

 

이 때문에 윤옥에게 원한을 산 것이 컸고 궁중에서 참소를 많이 입었다.

조정에서 김효원을 좋게 여기어 여러 차례 유망한 사람으로 주의(注擬)하였으나 일체 낙점되지

못하였으므로 시론이 의아해 하였다. 고 한다.

 

27세 때(1568년) 정언이 되었고, 31세 때(1572년, 임신) 9월 2일에 지평이 되었다.

   오건이 이조전랑에 추천하였으나, 사림으로 척신 윤원형(尹元衡)의 문객이었다는 이유로

   이조참의 심의겸(沈義謙)이 반대하여 거부당하였다.

 

32세 때(1573년) 사가독서하였고, 33세 때(1574년, 갑술) 5월 15일에 지평이 되어

    조정기(趙廷機)의 추천으로 이조전랑이 되고 8월 3일에 이조정랑이 되었다.

34세 때(1575년) 1월 11일에 부교리가 되고 1월 16일 헌납이 되어 2월 9일 장령이 되었으며

   10월 24일에 부령부사(富寧府使)가 되어 삼척부사를 역임하였다. 


42세 때(1583년) 안악 군수(安岳郡守)에 제수되었고,

44세 때(1985년) 황해도 암행어사 홍종록(洪宗祿)이 장계하기를

    안악 군수 김효원은 성품이 본래 강명하고 또 문학(文學)이 있어 일찍이 용방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인망이 이 때부터 높았는데 대성(臺省)에 출입하면서 명성과 지위가 더욱 드러나 한 때의 사류들이

    많이 허여하였다. 전랑(銓郞)으로 있을 적에 척리(戚里)를 천거하지 않았는데 척리가 이 때문에

    유감을 품어 드디어 동서로 나누어졌다. 

 

계미년에 척리의 당파가 뜻을 얻어 조정의 의논이 갈라져 사류들을 배척함이 매우 급박하게 되자

이에 효원이 힘써 외직에 보임되기를 청하였다.

관무(官務)를 봄에 있어 청렴 근실하고 처사가 강명하여 아전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사모하여

한 고을이 진심으로 추대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관청에 갖추어야 할 것은 모두 갖추어져 있고

일이 모두 제대로 성취되었으니, 그 정치가 한 도에서 제일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라고 하여 안악군수 김효원의 선정을 보고하였다.


선조 즉위 직후인 이 무렵 조정에는 유성룡(柳成龍), 이이(李珥), 김성일(金誠一), 김우옹, 정탁,

심의겸(沈義謙) 등 퇴계문인들이 기라성처럼 울립하고 있었으나,

연령상으로 이들보다 연상인 그는 직위에도 불구하고 신진 사림의 대표적 인물로 존경을

받게 되었으며, 1년 동안 사가독서기간이 끝난 후에는 여러 동문들의 추천으로 지평을 거친 다음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천거되었다. 


그는 선조 24년(1590)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49세였으며, 영흥 부사 김효원의 졸기에

영흥부사(永興府使) 김효원(金孝元)이 졸하였다. 효원은 통례원 통례(通禮院通禮)로서

전례대로 자급을 올려 영흥부사에 제수되었는데 1년이 지나서 고을에서 졸하였다. 

 

김효원은 벼슬살이에 있어서 청렴 결백하였고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도 정결하고

민첩하게 하였으며 세 고을을 역임하였는데 치적이 모두 우수하였다.

젊었을 때 날렵하여 일을 좋아하였고 논의가 과격하였으므로 동류들이 두려워하여

모두 그의 밑에 있었는데, 또한 이 때문에 여러 사람에게 원한을 사기도 하여 끝내 당파의

괴수라는 명목으로 죄를 얻어 외직에 보임되었다.

 

한직(閑職)에 있으면서 잘못을 반성하여 낮은 벼슬을 하찮게 여기지 않았고 시사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으며, 친구에게 보내는 서찰 내용에도 조정의 득실에 대해서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늘 탄식하면서 '당초 전조(銓曹)의 석상에서 발언한 한 마디 말은

단지 나라를 위해서였는데 어찌 이토록 분란이 생길 줄이야 생각했으랴.

나로서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의 부친이 영유 현령(永柔縣令)으로 있었는데 늘 문안갈 적마다 개성을 거쳐가게 되었다.

그런데 심의겸(沈義謙)이 유수(留守)로 있으면서 매우 다정스럽게 그를 영접하여 주자 효원도

그곳에서 하루 이틀 묵어가며 친구인 것처럼 즐겁게 지냈다.

 

그 후 효원이 안악군수(安岳郡守)로 부임하여 관아에 좌기(坐起)했을 때 의겸의 부음(訃音)을

듣고서 눈물을 흘리면서 ‘나의 친구를 잃었구나.’ 하고, 이틀간 좌기를 파하고 소식(素食)을 하였는데,

아마도 깊이 후회되는 바가 있어서 일 것이다.

 

유성룡(柳成龍)은 일찍이 그의 위인에 대해 논하기를‘인백(仁伯)은 강방정직(剛方正直)하니

의당 동류 중에서 제일인자가 될 것이다.’ 하였다.

당론(黨論)이 일어나게 된 것은 전조의 천망(薦望)에서 시작되어 대신들이 추감(推勘)한 데서

터진 것으로 야박스런 습속이 떠들어대며 서로 선동질한 것이지 이 두 사람이 각자 당파를 만들어

불화를 일으킨 데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김효원의 아우 김신원(金信元)·김의원(金義元)도 모두 명성이 있는 인물들이었고,

이들의 친구인 이성중(李誠中) 등의 논의 역시 완화(緩和)하여 처음과는 아주 달랐기 때문에

이발(李潑) 등은 이에 불만을 품고 자기들까지 떨어져 또 하나의 당파로 갈라졌다. 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이조판서의 증직이 내려지고 삼척 경행서원(景行書院)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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