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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대사의 어머님 교육
18세에 출가하여 소지선사에게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으며,혜명국사에게서 불교의 교리를 배운 후 묘향산에서 수도하였다. 조선 태조 원년(1392)에는 태조의 부름을 받고 그의 스승이 되어 도읍지를 물색하기도 하였다. 그 후 회암사에서 머물다가 금강산의 금장암이라는 암자에서 입적하였다. 비는 높직한 4각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간결한 모습이다. 지붕돌의 네 귀퉁이는 하늘을 떠 받들 듯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위를 향하고 있다. 비문에는 대사의 일생이 적혀 있는데 특히 원나라에 들어가 지공선사와 나옹선사를 만나 그들의 제자가 된 일, 한양천도에 큰 역할을 한 일, 회암사에 두 스승의 묘탑을 세운 일 등이 잘 나타나 있다. 태종 10년(1410)에 왕명을 받들어, 변계량이 비문을 짓고 공부의 글씨로 하여 비문을 새겨두었다 하나, 순조 21년1821)에 파괴되었고, 순조 28년(1828)에 다시 비를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왕이 무학대사에게 "내가 대사를 보니 꼭 돼지같이 보이오" 하니 무학대사는 아무말도 않고 "소승은 대왕을 보니 꼭 부처님 같이 보임니다"하니 이성계는" 아니 나는 돼지같이 보인다고 했는데 화를 내지않고 부처님같이 보인다고 하시오" 하니 무학대사 왈 "부처님 마음으로 보면 부처님같이 보이고, 돼지마음으로 보면 돼지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합천 무학대사 유적지(陜川無鶴大師遺蹟址) 33세손 목사공 贊 榮 합천군 대병면 천평동(합천댐으로 수몰된 곳)일대는 조선개국에 공헌한 무학대사(無鶴大師, 이름은 자초(自超)호는 溪月軒, 1327~1405)의 출생지로서 무학대사에 관한 전설이 깃든 유적들이 지금도 곳곳에 많이 남아 있는 것을 불 수 있다. 합천댐 아래를 塔坪이라 부르는데 옛날 이 곳 강 언덕에 탑이 있었다하여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求理坊 아래쪽 黃江 가운데는 무학대사가 병으로 고생하는 자기 어머니를 위해 숟가락으로 용바위 옆에 있는 바위를 파서만들었다는 호박같은 샘이 있는데 이 샘을 무학샘이라 부른다. 가뭄에 황강물이 말라도 무학샘은 마르지 않고 이 샘물로 몸을 씻으면 땀띠가 없어지는 약샘이었다는데 지금은 합천댐 공사 때 멸려온 자갈에 묻혀 흔적만 남아 있는 것을 불 수 있었다. 또 합천댐으로 들어가는 도로옆 자연석에는 無鶴王師出生事蹟址라고 새긴 자연석바위가 있는 곳에 무학대사가 18세 때 出家하면서 심었다는 감나무가 있다. 이 감나무에는 해마다 감이 열리면 가지마다 감의 모양과 크기가 각기 달라 이상한 감나무라고 하는데 지금은 관리 소홀로 고사직전에 있다. 감나무에서 도로를 따라 조금 오르면 왼쪽 악견산(岳堅山)기슭 자락에 무학대사의 천서(天書) 3卷이 묻혀 있다는 전설을 간직한 큰 바위가 비스듬히 놓여 있고 그 밑에는 이밖에도 무학탄(無鶴灘 (일명 장범이 너드랑), 鶴項嶺, 女怨禑 등 무학대사와 관련된 이야기가지금도 이 지역에 많이 전해지고 있다. 應允 (법명 慣拭)의 鏡岩集에 보면 무학대사의 事蹟說을 논한 기록이 있어 여기에 옮겨 참고 자료로 삼고자 한다. 논문 무학사적설 무학대사의 사적은 僧史에 기록되어 있지 아니하니 세속에 떠도는 말은 믿을 것이 못된다. 마땅히 비문으로 사실을 삼아야 할 것이다. 변계량이 지은 무학대사 비문에는 속가의 근본과 성명을 기록하지 아니했기 때문에 잘못 전해 오는 것이 많다. 지수 스님이 수사한은신암사적기에 말하기를 무학대사의 성은 염씨요 이름은 시생이고 어머니는 업비며 삼기고현사람이라하고 또 말하기를 실록은 보지 못했고 다만 시중에서 들은 것만을기록했을 뿐이라 하였다. 변지량이 지은 무학대사 비문에는 속가의 근본과 성명을 기록하지 아니했기 때문에 잘못 전해오는 것이 많다. 지수스님이 수사한 은심암적에 말하기를 무학대상의 성은 염씨요 이름은 시생이고 어머니는 업비며 삼기고현사람이라하고 또 말하기를 실록은 보비못했고 다만 시중에서 들은 만을 기록했을 뿐이라 하였다. 지열스님의 무학비기를 얻어보니 성은 성씨요 이름은 사겸이며 고려때 양경위 익제의 서자라 한다. 내가 또 한 기록을 보니 무학대사의 성은 박씨요 증보국숭록대부병조판서 치인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삼가부도사에 무학대사의 탑이 있는데 고을 사람들의 속된 말로는 문씨집안 노비의 첩의 아들이라 한다. 근자에 문씨 집안의 자손이란 사람이 무학대사 탑 앞에 있는 상석을 헐어서 자기 조부의 묘를 치석하려고 먼곳으로 가져가려 하는데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천둥번개를 치니 돌을 운반하던 사람이 두려움을 느껴 자기집으로 도망가서 놀라 스스로 죽었고 그 돌은 지금 길옆에 그대로 놓여있다. 부도사의 스님이 말하기를 부도사는 옛이름이 사나사였는데 무학대사의 부도가 있기 때문에 절 이름을 지금과 같이 부도사로 고쳤다고 한다. 가까운 곳에 영암사, 보암사,몽계사 있는데 모두 무학대사가 놀던 도량인데 또한 비문에는 기록된바 없다. 무학대사의 스승은 나옹스님이고 나옹스님의 스승은 지공스님이다. 목은 이문정공이지은 지공, 나옹 두 분 조사의 비문에는 그 어릴때 이름과 속성을 일찍이 기록하지 아니하였다. 대개 세속의 연원은 특히 도인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간략하게 한 것이다. 저 문씨 집안 사람과 같이 길거리의 속된 말들을 그릇 듣고 선현을 헐뜯고 욕보여 하늘에 죄를 지었으니 족히 괴이하다 아니하리요.』 위의 글에서 본것과 같이 사나사는 무학대사의 부도가 있어 절 이름을 부도사로 고쳤다 하였다. (新增東國與地勝覽, 1530년 편찬)에는 사나사에 부도사에 대한기록이 없다. 伽藍考(申景濬 지음 1712~1781)에는 사나사는 군의 서쪽 47리 지점 황산에 있다고 하였다. 또 梵宇攷(1779년 편찬)에는 군에서 북쪽 30리 지점에 있는 절로서 일명 부도사라 한다 했다. 寺刹全書(권상로 1879~1965)와 文化遺蹟總攬(문화재관리국편찬 1977년)에 보면 합천군 대병면 대지리 산2번지에 僧塔寺址가 있는데 초석으로 여겨지는 석물 10개가 남아 있고 그 중 1개는 雍正2年 4月化主玄訓이라 새겨진 글이 있다고 하였다. 초석에 새겨진 옹정 4년은 朝鮮 景宗4년(1724년)으로 조선시대 후기까지 사찰이 존재하여 법등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승탑이란 스님들의 사리를 봉안한 부도를 말하는데 그렇다면 승탑사가 혹시 무학대사의 부도가 있었다는 부도사를 말하는 것이 아닌었는지 한범쯤 생각해 볼 만하다. 또 문화유적총람에 보면 합천군 대병면 상천리 291번지에 절골이라 불리는 곳에 절터가 있는데 시대와 유래에 대한 기록은 알 수 없고, 이곳에 있던 석탑은 부산 동아대학교에 옮겨갔다고 하였다. 절터가 있는 상천리는 무학대사의 출생지라고 전하여 오는 곳으로 본다면 이 절터가 있는 상천리는 무학대사의 출생지라고 전하여 오는 곳으로 본다면 이 절터 역시 무학대사와 관련이 있었던 곳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 가람고에는 사나사가 황산(지금의 황매산)에 있다고 하였으며 구삼가군 지도에 보면 부도사는 보암사 옛터 옆 거창군 경계인 栗峙로 넘어가는 쪽에 표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여러 기록들을 살펴 봐도 부도사 절터를 考證할 수 있는 정확한 위치를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대병면 쪽 황매산 어디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 볼수 있을 것이다. 만일 부도사 절터가 발견 된다면 그 곳에는 지금 경기도 양주 회암사에 있는 무학대사의 부도와 더불어 대사의 탄생지인 이곳 합천에도 무학대사의 부도가 세워졌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부도사(사나사)의 옛터가 정확히 어느곳에 있는지 알 수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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