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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3.23 20:47 수정 : 201103.23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일제와 이승만 독재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언론은 나름대로 지사적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애써왔지만, 1960년대에 들어와 천관우의 표현처럼 연탄가스에 취하여 비명 한번 못 질러본 채 박정희에게 장악되었다. 박정희는 이승만에 비해 훨씬 더 과감하면서도 교묘하게 언론을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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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태 회장이 부산일보 소유 주식 등을 5·16장학회에 내놓기로 한 기부승낙서.
한홍구 제공 |
그때까지 잘 버티던 김지태는 7년이란 장기형이 구형되자 다음날인 5월25일 ‘포기각서’를 작성했지만, ‘기부’ 절차는 석방된 뒤에 밟겠다며 기부승낙서 작성을 거부했다.
그동안 박정희 일파는 바깥에서 김지태의 재산을 ‘헌납’받는 것을 전제로 5·16장학회 설립을 준비하고 있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문교사회위원장 손창규는 6월4일 박정희에게 5·16장학회 발족 준비 상황을 보고한 뒤 기자들에게 국내외 인사들의 희사금이 5·16장학회로 답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지태는 언론사의 사주이기도 했지만, 견직, 생사, 고무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사업을 하고 있던 실업인이었다.
그는 회사의 간부도 10여명이나 구속되고 자신이 끝까지 버틸 경우 수천 종업원이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김지태는 5·16 군사반란 직후 법무부 장관을 지낸 고원증이 박정희의 명을 받아
가져온 기부승낙서에 결국 도장을 찍었다. 구속 두 달여 만인 6월20일의 일이다.
김지태는 이틀 후 피고인이 “죄상을 외치고 경제개발계획 등 혁명 대열에 적극 참여할 가능성이 보이므로”라는 이유로 군검찰이 공소를 취하하여 석방되었다. 군사반란의
주역들에게 납치당한 인질 김지태는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 부산일보에 부산
서면 일대의 토지 10만평이라는 어마어마한 몸값을 치르고서야 석방된 것이다.
‘언론사 헌납’ 꾀를 낸 당사자는 황용주
박정희는 “펜은 칼보다 강하다”를 믿는 문화인은 아니었지만, 권력의 유지를 위해
자신이 직접 장악한 언론이 필요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1960년 4월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의 사진은 바로 김지태가
사장으로 있던 부산일보가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으면서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부산문화방송은 마산에서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을 때 중계차를
보내 시위의 상황을 생중계했다.
경찰은 부산문화방송으로 몰려갔지만, 실제 중계차의 실황중계를 받아 방송을
전국으로 내보낸 곳은 부산일보의 김지태 사장실이었다.
박정희는 당시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부산에 있었으며,
부산일보의 주필 황용주는 박정희와 대구사범 동기동창이었다. 그런 연유로 박정희는 부산일보사에 자주 출입했으며, 언론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잘 파악할 수 있었다.
일부에서는 박정희가 김지태에게 5·16 거사 자금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데 앙심을
품고 김지태에게 보복을 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중간에서 김지태에게 말을 전해야 할 황용주가 김지태에게 아예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다고 증언하는 것으로 볼 때 보복설은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박근혜 쪽에서는 흔히 김지태가 부정축재자라서 재산을 헌납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정작 김지태가 기소될 때는 부정축재처리법 위반은 기소 내용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4월혁명 뒤 자유당 정권 시절의 부정축재 환수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김지태는 환수
대상자에 포함되지 않았다. 5·16 군사반란 직후 부정축재 환수 문제가 다시
불거졌을 때 그는 5월30일 이병철 등 기업인 15명과 함께 구속되었다가 재산헌납
각서를 쓴 뒤 6월30일 석방되었다.
김지태는 8월2일 부정축재 환수금 9억2027만환을 통보받았고, 12월30일 최종적으로
5억4570만환으로 확정된 환수금을 주식과 현금으로 완납한 바 있다. 5·16 군사반란
직후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환수금을 완납한 사람들 중에서 다시 잡혀가
추가로 재산을 빼앗긴 사람은 김지태뿐이다.
일부에서는 김지태가 일제 때 동양척식회사에 잠시 근무한 것을 근거로 그가
친일파였기 때문에 재산을 환수당한 것이라고 주장하나 이 또한 터무니없는 얘기다.
김지태 같은 동척의 말단 직원까지 친일파라 할 수는 없고, 설혹 김지태가 친일파였다 하더라도 그보다 몇 배 더한 친일파인 박정희가 김지태의 재산을 친일행위를 이유로 ‘헌납’받는다는 것은 소가 웃을 일이다.
박정희는 이미 온 나라를 차지했다. 김지태가 아무리 재벌이라지만, 박정희가 김지태의 돈이나 땅이 탐나서 그를 다시 잡아들인 것은 아니다. 박정희가 탐냈던 것은
언론사였다.
박정희는 김지태의 수많은 재산 중에서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언론사를 요구했던
것이다.
이 무렵 박정희는 중앙일간지로는 시인 구상을 내세워 <경향신문>을 매입하려다 실패한 바 있다.
김지태의 유족이나 당시 부산일보, 부산문화방송, 한국문화방송 관계자들은 박정희에게 김지태로부터 언론사를 ‘헌납’받으라는 꾀를 낸 당사자로 한결같이 황용주를
꼽는다.
박정희가 사건의 감독이었다면 기획과 시나리오는 황용주가 담당했다는 것이다.
황용주는 부산일보가 5·16장학회의 소유가 된 뒤 부산일보 사장을 지낸 데 이어
한국문화방송 사장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몹쓸 꾀를 내어 다른 사람의 피눈물을
흘리게 한 사람이 끝이 좋을 순 없다.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황용주도 젊은 시절 좌익 활동을 했는데,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박정희 주위에 좌익 전력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불편해했다.
김형욱은 황용주가 문화방송 사장 신분으로 잡지 <세대> 1964년 11월호에
<강력한 통일정부에의 의지>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을 주장하자 그를 반공법 위반으로 잡아넣었다.
김지태가 아무리 재벌이라지만돈이나 땅이 탐나서그를 다시 잡아들인 건 아니다
박정희가 탐낸 건 언론사였다 “음수사원(飮水思源):물 마실 때 그 근원을 생각하라”
박정희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5·16장학회에 이 휘호를 남겼을까
지금의 방송파업은 ‘5·16반란과의 싸움’
박정희는 김지태의 팔을 비틀어 언론사를 빼앗았지만 이를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정부기관지로는 서울신문이 이미 있는데다,
생사람을 잡아다가 신문사를 강탈해서 국가의 소유로 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당시 부산일보, 부산문화방송, 한국문화방송의 주식은 김지태와 그 주변인들의 명의로 되어 있었지만, 실소유주인 김지태가 부일장학회의 몫으로 떼어놓은 것이었다.
박정희 일파는 그 형식을 그대로 차용하여 부일장학회 대신 5·16장학회를 만들었다.
부일장학회는 박정희에게 강탈당할 때까지 법인으로 정식 등록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 규모나 내용 면에서 볼 때 단연 전국 최고의 장학회였다. 1958년 11월 설립된
부일장학회는 1962년 6월 사라질 때까지 4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중·고·대학생
1만2464명에게 전부 17억7032만4450환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연간 3000여명에게
1인당 약 14만환의 장학금을 지급한 것이다.
당시 문교당국에 등록된 육영법인 37곳 중 가장 규모가 큰 상이군경장학회가
연간 300명의 학생에게 5만환씩 총 1500만환을 지급하였으니 부일장학회가 전후의
곤궁한 시절에 얼마나 큰 기여를 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지금 정수장학회 쪽은 정수장학회가 한국에서 가장 모범적인 장학회로 지난 50년간
3만8000여명에게 수여했다고 주장하지만, 부일장학회에 비할 바 아니다.
김지태 회장은 사재를 털어서 막대한 장학금을 지급했지 누구처럼 1년에 2억 안팎의
거금을 받아 가지도 않았다.
5·16장학회의 임원이나 5·16장학회 소유가 된 문화방송의 임원으로는 고원증처럼
부일장학회의 강탈에 한몫을 한 사람들도 있지만, 대구사범 출신과 박정희의
친인척이나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요컨대 박정희의 동창이나 친인척의 애로사항을 해결해주는 기구 노릇을 했던 것이다.
박정희가 죽은 뒤 박정희의 양아들 격이었던 전두환은 5·16장학회의 보유 주식에서
한국문화방송 주식의 70%를 빼앗아 한국방송공사(KBS)에 주어버리는 대신,
나머지 자산은 박정희의 유족들이 관리하도록 했다. 케이비에스가 보유하고 있던
엠비시 주식 70%는 1988년 방송문화진흥회로 넘어갔다.
장물이 여러 번 손을 탄 것이다.
국정원 과거사위가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가자 2005년 박근혜는 10년 넘게 맡아오던
이사장직을 내놓았다. 후임 이사장 최필립은 유신 시절 청와대 의전비서관으로
박정희가 최태민 목사에게 휘둘리는 어린 딸 근혜를 보호하기 위해 후견인 격으로
붙여 둔 자였다.
5·16장학회는 1982년 박정희에서 정, 육영수에서 수를 따서 명칭을 정수장학회로
변경했다.
정수장학회는 박정희와 육영수의 이름을 내걸었지만, 박정희나 육영수의 개인 재산은 한 푼도 출연되지 않았다.
옛말에 개같이 벌어 정승처럼 쓰라는 말이 있다지만, 납치범이 몸값을 뜯어내
그 돈으로 장학금을 준다는 것은 그 돈을 받는 학생들을 모욕하는 일이다.
박정희는 5·16장학회에 ‘음수사원’(飮水思源)이란 휘호를
남겼다. 물을 마실 때 그 근원을 생각하라는 뜻이다. 박정희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이런 휘호를 남긴 것일까.
지금 이 순간 한국방송(KBS), 문화방송(MBC), 와이티엔(YTN) 등 3개 방송사와
연합뉴스, 부산일보, 국민일보가 언론의 공정성 회복을 위해 파업을 하고 있다.
박정희가 만들어놓은 언론 장악 체제가 민주정권 10년 동안 잠시 숨죽였다가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 언론인들의 눈물겨운 파업은 유신체제를 타파하기 위한, 아니 그보다 10년은
더 거슬러 올라가 정보장교들이 일으킨 5·16 군사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민주주의의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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