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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124)

영무성 하응도(寧無成 河應圖)

by 석암 조헌섭. 2012. 2. 4.

영무성 하응도(寧無成 河應圖)
 
 하응도(河應圖, 1540∼1610)의 자는 원룡(元龍)이고, 호는 영무성(寧無成)이며,

본관은 진양(晋陽)으로 신풍(新豊)에 거주하였다.

그는 1540년(중종 35년) 3월 19일 부장(部長) 박(泊)과 진양(晋陽) 강씨(姜氏) 사이에서

진주 신풍리(新豊里: 현재 진주시 대평면 신풍)에서 태어났다.

그에 관한 자료는 {영무성일고(寧無成逸稿)}가 있다.  

 

7세 때(1546년) {소학}을 공부하였고,

15세 때(1554년) 오경(五經)의 대의(大義)를 대략 섭렵하였다.

16세 때(1555년) 남명선생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고,

22세 때(1561년) 덕산동으로 남명선생을 찾아 뵈었다.  

 

24세 때(1563년) 봄 2월 남명선생을 따라서 남계서원을 배알하고,

    임훈(林薰)과 임운(林芸)을 여소(廬所; 外艱喪)에서 위로하였는데

    하항(河沆), 유종지, 진극경, 강익, 조종도 등이 남명선생을 따라 남계서원에 배알하였다.

26세 때(1565년) 남명선생의 문하에서 최영경을 뵈었다.

 

27세 때(1566년) 남명선생을 따라 노진, 오건, 강익 등과 더불어 지곡사(智谷寺)에 모였다.

    이 때 하응도는 이광우와 김우옹 및 원근의 선비들과 함께 하였는데,

    강익, 노관, 정복현, 임희무, 정유명 등이 모두 소문을 듣고 모여 공부하고 남명선생을 따라

    오건의 집으로 가서 머물렀다. 

 

2월 남명선생을 따라 단속사(斷俗寺)에서 이정(李楨)과 만나고 조종도와 더불어 가서 머물렀다.

3월에 남명선생을 따라 이정(李瀞), 임훈(林薰), 하항(河沆), 조종도, 하응도, 유종지, 노진 등과

안음(安陰) 옥산동(玉山洞)으로 가서 심성정(心性情)을 공부하였다. 

29세 때(1568년) 단속사(斷俗寺)에서 과거 공부를 하였고, 

32세 때(1571년) 봄 정월에 남명선생을 배알하고 [사상례(士喪禮)]를 받았다. 

 

33세 때(1572년) 남명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장례절차는 남명선생이 생전에

    하응도, 손천우, 유종지 등에게 써 준 [사상례절요(士喪禮節要)]를 따랐다.
37세 때(1576년) 동문 제현들과 더불어 덕천서원을 창건하고 남명선생을 모셨다.

    전에 그는 남명선생을 가까이에서 자주 뵙고자 덕천서원의 터에 모옥을 짓고 살면서,

    선생을 모시고 노닐었는데, 서원 건립의 논의가 있자,

 

그 터를 선뜻 서원의 부지로 기증하였다. 남명선생의 제자들이 모여 의논하기를

'덕산(德山)은 선생께서 만년에 강학하시던 곳이니 서원이 없을 수 없다.

그러니 남명선생을 위한 서원을 건립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최영경, 하항(河沆), 손천우, 유종지, 하응도, 이광우, 이로, 이조 등이 주축이 되어

곧 산천재 서쪽 삼리 쯤 도천(桃川) 위에 서원을 건립하니, 곧 덕산서원이다. 

 

34세 때(1573년, 계유) 식년 진사에 제3등으로 합격하였다.
44세 때(1583년) 2월에 동문 제현과 더불어 섬진강에서 배를 타고 놀다가 덕천으로 들어가

    서원을 배알하였다. 

 

46세 때(1585년) 삼종제(三從弟) 응일(應一)이 와서 배웠다. 

   1592년(임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주성이 함락되어 이원익(李元翼)의 천거로

    진주판관이 되어 흩어진 부민들을 수합, 안집(安集)하게 하였다.

    실천궁행(實踐躬行)에 힘썼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50세 때(1589년) 해고 이광정과 더불어 최영경의 무고함을 신구(伸救)하는 글을 썼다.

51세 때(1590년, 경인) 서울에 올라가 최영경을 신구하였고 봉림사(鳳林寺)에 가서

    해고 이광정, 월사 이정구와 더불어 최영경의 옥사에 대한 논의를 신구하는 글을 썼다.

    7월 11일 이로, 오장, 박제인, 이대기, 하혼, 이정(李瀞) 등과 더불어 합천에서 최영경의 신원소를 올렸다. 

 

54세 때(1593년) 6월에 대소헌 조종도의 서한에 답하였다. 

57세 때(1596년) 정월 덕산으로 들어가 정개성별장(鼎蓋城別將)이 되었고,

58세 때(1597년) 정월에 장원서 별좌(掌苑署別座)를 제수받았다.

    7월 사근도 찰방(沙斤道察訪)을 제수받고 진주판관(晋州判官)으로 이배되었다. 


59세 때(1598년) 4월에 박제인, 의령현감 조차석과 더불어 개령곡(開寧谷) 송촌(松村)으로 가서 머물렀고,

61세 때(1600년, 경자) 이광정(李光庭)이 찾아왔으며

66세 때(1605년) 하동(河東) 감사(監司) 유영순과 함께 청학동(靑鶴洞)에서 놀았다.

67세 때(1606년) 세마(洗馬) 하혼의 [족보연고사(族譜聯藁事)]에 대한 논의에 답하였다.

한강 정구와 더불어 대원암(大源菴)에서 놀았다.

 
 69세 때(1608년) 3월에 덕산으로 들어와 살 곳을 정하였다. 덕산은 하응도가 어릴 때부터

    남명선생에게 글을 배우던 곳이며, 또 스승 남명이 묻힌 곳이기도 하다.

    외지에 있으면서 항상 마음 속에 둔 덕산 땅에 비로소 돌아와 만년의 삶을 보내게 되었다.

    이 때의 감회가 {문집}에 전한다. [덕산에 돌아와 살며]라는 시이다.

 

'70세에 고향으로 돌아오니, 쓸쓸한 생활 한칸 초옥 뿐이네. 도화 뜬 맑은 물 예전과 같은데,

다만 옛날의 선생 모습만 없네'라고 하였다.

늘그막에 덕산으로 돌아와 남명선생에게서 글 배우던 때를 생각하며 지난 날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71세 때(1610년) 2월에 산사(山舍)에서 세상을 떠나니 평소의 뜻에 따라 덕천서원

뒷 쪽에 장사지냈는데, 후학들이 남명선생 장례 때의 예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1718년 수곡의 대각서원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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