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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남계 임희무((藍溪 林希茂, 1527∼1577)

by 석암 조헌섭. 2012.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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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계 임희무(林希茂, 1527∼1577)

임희무의 자는 언실(彦實)이고, 호는 남계(藍溪)이며, 본관은 나주(羅州)로

함양(咸陽)에 거주하였다.

그는 1527년 함양군 동쪽 서평촌(黍坪村: 현재 수동면 원평리 서평)에서

아버지 참봉 각(珏)과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에 태어났다. 

그는 당곡(唐谷)의 문인이기도 하다. 그의 문집은 남계집(藍溪集)이 있다. 

 

23세 때(1549년) 8월 초순에 감악산으로 남명선생을 모시고 유람하였다.

    남명선생은 감악산에 와서 포연(鋪淵)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이 때 그는 고향 선비 박승원(朴承元)과 같이 찾아 갔다. 

 

    남명선생은 산수를 완상하고 포연에서 함께 목욕하면서 [욕천(浴川)]이라는 시를 남겼다.

     사십 년 동안 더럽혀져 온 몸,  / 천 섬되는 맑은 못에 싹 씻어 버리네. 

     / 만약 티끌이 오장에 생긴다면,  / 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부치리. 라고 하였다. 

 

26세 때(1552년) 강익(姜翼)을 비롯한 이 지역 선비들과 정여창(鄭汝昌)을 배향할

    남계서원(溪書院)을 창립하는데 온 힘을 다하였다.

32세 때(1558년) 남명(南冥)선생을 스승으로 모셨다.  그 해 노진, 이후백(李後白), 강익,

    오건 등과 학문을 연마하여 별시에 급제하였다.

 

    1558년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예(禮)를 다하여 부친상을 마치고 이어 벼슬길에 올랐는데,

    성균관 학유, 홍문관 정자, 사헌부 지평, 정언, 장령 등을 지내고 외직으로는

    금산, 순창, 밀양, 울산, 능주 군수 등을 두루 지냈다.

    능주군수를 마지막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로 내려와서 학문에 몰두하였다.


37세 때(1563년) 3월에 남명선생이 남계로 와서 정여창의 사당을 배알하고

    여러 문생들의 강론을 들었다. 

   이 때 문경호(文景虎), 강익, 정유명, 정복현 등 이 지역 선비들과 이 자리에

   참석하여 남명선생과 같이 온 하항(河沆), 하응도, 유종지, 진극경 등과 강론하였다. 


40세 때(1566년) 봄에 남명선생을 모시고 노진(盧), 강익, 김우옹 등과 산청의

    지곡사(智谷寺)에 모여 여러 날 동안 자연을 완상하며 시를 읊조리고 돌아왔다. 

   '초 십일에 선생께서 지곡사에 이르니 덕계[오건]가 노공[盧]을 맞이하여 와서 뵈었다. 

 

 이튿날 강익, 김우옹, 정복현, 도희령, 정유명 등이 잇달아 이르렀고 멀고 가까이 있는

 선비들이 소문을 듣고 구름처럼 모여서 여러 날 동안 학문을 강론하였다'고 한다. 

인근의 이름난 선비들이 모인 자리에 남계(藍溪)도 참석한 것이다. 

이 해 남명선생과 안의 화림동으로 유람을 같이 가서 동료들과 산수를 구경하기도 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부친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반드시 우리 집안을 빛낼 아이'라고

하면서 많은 기대를 하였다. 부친에게서 글을 배우던 임희무는 당시 함양에서 많은

선비들을 가르친 당곡 정희보의 문하에 들어가 수업을 하였다.

이 때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명성은 인근에 자자하였다.

 

그는 낙향 후 현재 망북정(望北亭) 자리에 오두막집을 지어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들을 지도하면서 항상 임금을 그리는 마음을 잊지 않았다지만

다시는 한강을 건너지 못하고 남쪽 땅에서 1577년 5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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