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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명(墨名) 묵명(墨名)이란 예전에, 이름을 먹칠하여 지우는 형벌(刑罰)을 이르던 말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생물이나 유무형(有無形) 물건에는 이름이 없는 것이 없다. 식물이나 동물, 벌레까지도 모두 제각기 이름을 갖고 있다. 특별히 사람의 이름에 우리 민족은 너무나 집착적(執着的)인 면을 갖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좋은 이름 나쁜 이름에 따라 운명(運命)이 뒤바뀌고 행복과 불행이 따르고 실패와 성공을 한다기에 작명가(作名家)를 찾아가 이름을 짓는데, 이름을 지을 때는 오기와 수리, 음양을 따지고 사주에 맞게 본관(本官)의 항렬(行列)을 따라 짓는다. 한국인은 이름에 대한 집착(執着)이 강하다 못해 처절한 걸까? 이름이야 말로 자기 표현이며 자기를 대표 하므로 이름이 자아(自我)이고 자기를 신성시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오죽하면 자식에게 천금(千金)을 물려 주는 것보다 기술(技術)을 하나 가르쳐 주는 것이 좋고, 기술하나 가르쳐 주는 것보다 이름하나 잘 지어 주는 것이 좋다고 했을까? 한 번 지어진 이름은 평생(平生)을 먹고 살만한 운을 짊어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름을 소중히 해 왔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대부분 부모가 지어준 자신의 이름이나 조상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자기 수신(修身)을 하며 노력을 많이 해왔다. 이처럼 자신의 선조나 자신의 이름에 먹칠하는 것을 묵명(墨名)이라 한다. 우리나라 사람은 예부터 이름이 가장 많은 국민이다. 아이 때부터 부르는 아명(兒名)이 있고 관명(冠名), 자(字), 아호(雅號), 시호(諡號) 등이 있다. 또한, 가족 중심 사회의 족벌(族閥)구조 속에서 선조나 선친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을 죄악시해온 민족(民族)이다. 그것은 이름에 대한 신성시 때문이다. 산소에 비석(碑石)에도 이름을 넣지 않을 수 없으므로 누구 비석을 막론하고 휘(諱)자가 없는 것이 없다. 휘(諱)는 꺼릴 휘자인데 말하자면 신성한 존함(尊銜)을 새기지 않을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기록(記錄)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중국에 유명한 시인 두보는 아버지 이름(杜閑두한)도 閑자가 있으므로 시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한가할 한(閑)자가 그 많은 두보의 시에 한 자도 볼 수 없다.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는 우스운 일이지만, 이름을 얼마나 중요시했나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조선 후기 영의정을 지낸 이상황(李相璜)이 충청도 암행어사가 되어 괴산군을 찾았을 때 일이다. 어사가 고을 입구에 다다르자 한 농부가 비(碑)에다 진흙칠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를 이상히 여겨 물으니, 그 농부(農夫)는 “암행어사가 온다는 소문이 퍼지자 고을 사또의 명을 받은 이방이 사또의 이름이 새겨진 선정비(善政碑)를 급히 나무로 만들어 세우라 했는데, 혹시 혹시 눈먼 어사가 이것을 진짜로 여길까? 걱정돼 진흙 칠을 하는 것”이라 답했다. 이를 들은 어사는 그 길로 동헌으로 들어가 사또를 파직시켜 버렸다. 이는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 마지막인 해관편(解官篇)에 나오는 내용이다. ‘해관(解官)’은 관직에서 물러난다는 뜻이다. 목민관이 벼슬을 거만두고 물러날 때 그 고을 백성들이 슬퍼하고 막아선다면, 이것이 참다운 선정을 베푼 증거(證據)라는 것이다. 그러나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거짓 칭송하는 글귀를 새겨 선정비를 세운다면 그것은 자기 조상 이름에 먹칠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경관(景觀)이 아름다운 풍악산이면 어디라도 바위에 잔서완석이 남아있는지라, 예부터 자신의 이름 알리기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가를 알 수 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로 달도 차면 기울듯이 정상까지 오르면 언젠가는 내려와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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