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이야기

과거 8 폐[科擧 8 弊]

by 석암 조헌섭. 2017. 11. 11.
728x90
반응형
거 8 폐[科擧 8 弊]

수능시험일[11월16일]이 포항지진(5,4)관계로 일주일 늦춰 23일로
연기
[延] 
되었다. 예로 말하면 초시[初試]쯤 된다.
선조들의 과거장 시험일에는 오불심요[五不心要] 금지해야 할 사항이 있었는데…

1. 과거 시험을 보는 수험생에게 간밤의 꿈을 묻지 말라 했다. 
  나쁜 꿈이면 부담을 갖게 되고 좋은 꿈이면 요행을 바라 긴장을 늦추게 되니까. 

2. 어떤 신이든 신에게 빌지 말라 하였다. 
  신에 의지하고 싶은 부모 마음이 수험생
[]에게 부담감을 주기 때문이다. 


3. 시험일에는 평상시와 다른 옷을 입거나 다른 음식을 먹지 말라 하였다. 
  평상시와 다른 신체의 리듬이 깨지면 사고의 리듬도 깨지기 때문이다. 

4. 시험장에 가지고 가는 붓이나 벼루를 새것으로 하지 말라 하였다. 
  평상시 쓰던 물건이 손에 잘 익어 답안지 작성이 쉽기 때문이다. 

5. 부모·형제가 과거장[] 밖에서 기다리지 말라 했다. 
  수험생의 마음은 급해지고 평상심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고3 수험생을 가진 가정은 마음에 새겨 부디 좋은 성적으로 원하는 학교에 
합격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일전에 조선시대 과거시험[]을 재현하는 행사가 경복궁 근정전과
 수원, 각 지방 향교[] 등 에서 열렸다.
의관을 정제하고 시제에 따라 각기 연마한 실력을 발휘[]하는 모습이 흡사
 조선시[朝鮮時代]대로 희양하는 것 같은 풍경이었다.
 
조선시대 서원 중 일부 서당이 초등교육기관이라면, 중등교육기관으로는
 한양의 사학[四學]과 지방의 향교 같은 관립[] 교육기관이 있었고, 
서원 같은 사립교육기관이 있었다.
조선 중기 정치적 좌절을 겪은 사림[]들이 지방으로 낙향하여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는데, 이것이 바로 서원[]이 건립되기 시작한 시초였다.
 
서원이 유교적 국가이념[國家理念]을 널리 전파하였기 때문에, 조정에서도
 사액서원(賜額書院) 제도를 두어 서원을 장려했다. 

조선의 서원에서는 송나라의 주희[朱熹]가 만든 [백록동서원규]와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지은 [이산원규]를 원규의 기본 골자로 삼았다. 

서원에는 원장[院長], 강장[講長], 훈장[訓長] 등 여러 직책의 교사가
있었다. 
원장은 오늘날의 교장 선생님과 같은 사람으로 산장[山長] 혹은 
동주[洞主]라고도 했다. 
 원장은 보통 퇴직한 고위관리[高位官吏]나 덕망이 높은 큰선비가 맡았다. 
강장은 강의를 담당하는 선생님으로 주로 경서를 강의하고 예법을 가르쳤다. 

 또 훈장[訓長]은 학생들의 서원생활을 지도하는 훈육교사였다. 
이들은 모두 비교적 높은 수준의 학식과 품행[品行]과 덕망을 갖춘 자들로,
 지역 유림의 합의를 통해 공인받은 교사들이었다. 

학생들의 입학자격[入學資格]은 서원에 따라 저마다 달랐지만 대체로 입학이 

어려운 편은 아니었다. 
보통은 생원이나 진사 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우선 입학시켰고, 
다음으로는 초시[初試] 합격자를 입학시켰다. 그러나 초시에도 합격하지 못한
사람이어도 면학열이 뜨겁고 품행이 단정하면 큰 문제 없이 입학할 수 있었다. 

교육과목으로는 서원에서는 유교의 경전을 가장 기본적인 학습 교재로 삼았다.
 사서삼경[]은 물론이거니와 그 범위에서 확대되어 유교의 13경을
 숙지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성리학[性理學]관련 서적들을 공부했다.
 예를 들어 주돈이[周敦頥]의 [태극도설], 장횡거의 [장재집],
 이정 형제의 [이정집], 주희의 [주자어류], [성리대전]등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서원의 공부가 유교 경전이나 성리학자들의 저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경전 학습과 함께 강조되었던 것은 역사[歷史]공부였다. 
그래서 [사기], [자치통감], [송사] 같은 방대한 역사서도 함께 공부했다. 

그리고 정서를 함양하고 표현력을 키우기 위해 각종 문학 서적들도 공부했다.
 [이태백 시집], [두보 시집]과 [고문진보>]같은 문학서적[文學書籍]
그 교과서가 되었다. 

또 역법[曆法]이나 산술, 간단한 의학[醫學]지식을 쌓는 실용 학습도 간간히

 이루어졌다. 하지만 깊이 있는 사상 서적이라 해도 노장철학[老莊哲學]이나
불교에 관한
책은 절대 금지[]되었다. 
이것들은 정통 유교[儒敎]의 정신을 해치는 이단사설로 판정되기 때문이었다. 

*옛말에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집에서는 엿 달이는 냄새가 끊이지 않는다"
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당분 섭취가 두뇌 활동을 촉진시켜주기 때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시험을  준비한다는 것은 당사자나 가족 모두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보통 문과의 시험은 1차 시험인 초시[初試]와 2차 시험인 복시[覆試]가 있었고, 
그것들은 각각 초장, 중장, 종장의 세 단계로 나뉘어 치러졌다. 
초장에서는 경전에 대한 암기와 이해를 평가했고, 중장에서는 문장력을
평가했으며, 마지막 종장에서는 조정 현안에 대한 논술 시험,
 즉 시무책[時務策]을 치렀다. 

어떤 시험이든 부정행위[不正行爲]는 있게 마련이었다. 옛날 과거 시험에서도
 다양한 부정 행위가 일어났다. 컨닝종이를 만드는 단순 행위에서 집단적으로
 모의한 조직 부정까지 형태도 무척 다양했다. 

조선시대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정조 시대에도 과거장[]에는 부정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모양이다. 시험 한 번에 입신양명의 출세 길이 보장되었던 시대라
컨닝의 유혹
[]
 뿌리칠 수 없었는가 보다. 
순조 18년(1818) 성균관 사성 이영하가 올린 상소에는 8가지의
폐단[]이있었는데,

차술차작(借述借作) : 남의 글을 몰래 빌려 쓰는 일 
수종협책(隨從挾冊) : 책을 시험장에 가지고 들어가는 일 
입문유린(入門蹂躪) : 수험생 아닌 사람이 시험장에 들어가는 일 
정권분답(呈券分遝) : 시험지를 바꿔치기하는 일 
외장서입(外場書入) : 시험장 밖에서 다른 사람이 써서 주는 일 
혁제공행(赫蹄公行) : 시험 문제를 미리 유출시키는 일 
이졸환면출입(吏卒換面出入) : 감독관을 바꾸어 들여보내는 일 
자축자의환롱(字軸恣意幻弄) : 답안지를 가지고 농간을 부리는 일


또한, 이러한 부정행위를 감시하기 위해 감독관[監督官]이 도장을 갖고
 다니면서 찍기도 하였는데,

고반--남의 답안지를 훔쳐 볼 경우,  /  권--대리시험 적발 시 이석--자리를 떠나
외부인과 접촉 시,  낙지--커녕 페이퍼 반입 시.
음아--옆 사람이 들을 정도로
중얼거릴 때.
요즘 시험 칠 때 커닝이 많아지면서 이에 대한 지,용,신, 인,의, 예,
6가지 커닝 도[道]가 생겨났으니


*감독자의 특성과 우등생의 위치를 아는 것은 `지[智], 라하고,
*감독자가 바로 옆에 있어도 과감하게 실행 하는 것을 `용[勇], 이라 하며,
*커닝한 답이 이상해도 그것을 의심치 않는 것을 `신[信)],이라하고, 

*남이 커닝하다 들킨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지니니 이를` 인[仁]이라 하며,
*커닝하다 들켜도 근원지를 밝히지 않으니 이를 `의[義], 라 하고,
*보여준 사람보다 점수가 약간 낮게 베끼는 것이니 이를 `예[禮]라 한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부정행위가 더욱 심해져서 거의 통제가 불가능해졌다. 
 또 지방의 향시(鄕試)에서는 수험생들이 작당하여 시험장을 습격하고 
감독관을 폭행하는 난동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어떤 시험이든 부정행위는 있게 마련이었다. 옛날 과거 시험에서도 다양한
 부정 행위가 일어났다. 컨닝페이퍼를 만드는 단순 행위[]에서 집단적으로
 모의한 조직 부정까지 형태[]도 무척 다양하였다고 한다

2017년 11월
석암 조 헌 섭


다이아 아이오아이IOI 정채연 차길영, ‘수능응원가’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묵명(墨名)  (0) 2017.11.26
역경[易經]  (0) 2017.11.20
관광[觀光]  (0) 2017.10.28
대화[對話]의 중요성  (0) 2017.10.14
거풍즐풍(擧風櫛風)  (0) 2017.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