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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안희제(白山 安熙濟)1885-1943년 백산 안희제(白山 安熙濟 )생가 1885년 경남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출생 충절의 고장 경남 의령 출신 독립운동가 3백, 백범 김구,(白凡 金九), 백암 박은식(白巖 朴殷植), 백산 안희제(白山 安熙濟)} 중의 한 사람이며, 백범 김구{백범 김구,(白凡 金九), 선생과 백산 안희제(白山 安熙濟) 선생 두 분만을 따로 양 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의령[宜寧[에서 20세까지 살다 의령 땅 200마지기를 팔아 부산에서 1914년 백산상회를 경영 무역업[貿易業]종사 40년간 독립운동 연락처[連絡處]와 독립운동[獨立運動] 자금으로 사용했다. 민족자본의 육성 자였고, 민족교육의 선구자였으며, 민족사상[民族思想]의 고취 자로서 항일 독립투사[獨立鬪士]였다. 경주최씨 최진사와 똑같은 금액으로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使用]했고. 백산상회에 만해 한용운[韓龍雲]을 두 번이나 피신시켰다. 1911년 북간도, 블라디보스톡에서 최병찬과 『독립순보』 간행 1913년 백산상회를 설립하고, 1917년 구포의 윤현태와 100만 원으로 백산무역주식 회사 설립 국내지주들이 기부, 기탁한 자금을 상해로 송금, 해외 독립운동의 국내 연락과 자금공급 총책을 맡았다. 1933년에는 만주 동경성 발해농장 경영 발해학교를 설립하고 자녀들의 교육[敎育]에 힘썼다. 동래 구명 학교와 의령 의신학교를 창립 교육 사업[事業]에 힘썼다. 1909년 서상일, 신성모, 박중화, 를 비롯 80여 명의 동지를 규합 항일 비밀 결사대를 조직 구국운동[救國運動]을 전개[展開]하였다. 1914년 1925년 중외일보(현 중앙일보)를 맡아 사장이 되어 일본의 총독 정치를 맹렬[猛烈]히 비난[非難]하였다. 1931년에는 대종교에 입교하여 많은 활동[活動]을 하던 중1942년 일본 경찰에 대종교사건으로 체포, 혹독한 고문으로 9개월 만에 병보석[病保釋]으로 풀려났으나 1943년 7월 31일 병보석 가출옥, 동년 8월 3일 59세로 목단강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 단장 표창[表彰]을 받았다. 백산 안희제의사 순국 기념비 백산 기념관 앞 표지석 부산 여행하시는 분들이 꼭 방문하시는 곳중 하나가 바로 자갈치 시장과 그 주변에 위치하고 있는 부평시장, 국제시장[國際市場], 패션의 거리, 용두산공원 등이 있는데, 백산기념관은 바로 패션의 거리와 용두산공원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다. 부산여행에서 마음만 먹으면 찾아보기 너무 좋은 장소[場所]에 위치[位置]하고 있다. 백산기념관이 이곳에 위치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그 유명햇던 백산상회 때문인데, 백산상회는 백산 안희제 선생께서 만든 민족 자본주식회사로 주식회사의 형태로 만들어져 민족자본형성과 독립운동[[獨立運動]]을 위해서 큰 노력[努力]을 했던 회사였다. 얼마 전 교학사 교과서 문제와 관련해서 논란이 되었던 문제 중 하나가 민족자본형성 주제와 관련[關聯]된 내용이었는데, 그 사례로 소개되었던 인물[人物]이 바로 인촌 김성수였다. 그의 행적[行跡]과 관련해서 논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자본형성을 위한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소개되었던 것인데, 이 주제와 관련해서 사실 약점이 없이 부합되는 인물이 바로 백산 안희제[白山 安熙濟] 선생이었던 것이다. 기념관 입구에 있는 백산 안희제 선생의 동상 백산 안희제 선생을 이야기 할때 반드시 빼놓지 말아야 할 분이 바로 최준 선생인데, 최준 선생은 일반인들에게는 경주 최 부자로 알려진 분이다. 최준 선생이 바로 백산상회에서 가장 많은 주식을 보유했던 분이다. 본인의 재산[財産]을 독립운동을 위해서 쓰기도 했고, 그 많던 재산을 교육을 위해서 모두 사용했던 분이다. 해방 후 교육을 위해서 최준 선생이 전 재산을 투자하여 대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사업을 벌이기도 했던 분이다. 그가 설립했던 학교가 바로 대구대학교인데, 그 위대한 독립운가가 만든 대구 대학교가 지금은 영남대학교다. 대구대학교가 왜 지금의 영남대학교가 되었는지는 별도로 적지 않겠다. 이게 바로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이라는 것 밖에는… 최준 선생[崔浚 先生] 최준 선생은 경주 최부자로 그의 상당수의 재산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금으로 제공했는데, 자금을 전달하는 창구가 바로 백산 안희제[白山 安熙濟] 선생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경주 최 부자 최준 선생은 자금을 전달할 당시에는 예를 들어서 본인이 100원을 전달해주면 여비 등이 사용 될 테니 최소한 80원 정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들어가겠지 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훗날 독립이 되고 백산 선생은 돌아가셔서 자리에 없는데 백범 김구[白凡 金九] 선생이 최준 선생을 찾아오게 된다.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 전달해주었던 독립자금과 관련된 영수증을 보여주며 고마움을 전했다고 한다. 최준 선생이 그 영수증(장부)를 받아보고는 본인이 백산 선생에게 전달했던 자금이 조금도 다르지 않게 전달된 것을 확인[確認]하게 된 것이다. 결국, 백산 선생은 한 푼의 돈도 낭비하지 않고 모두 독립자금으로 전달해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최준 선생은 본인이 조금이라도 백산 선생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었던것을 후회하고 백범 김구 선생과 함께 대성통곡[大聲痛哭]을 했다고 한다. 경주 최부자로 알려질 정도의 재산을 보유했으면서도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현했던 최준 선생이나 부탁받은 독립자금을 한푼도 낭비하지 않고 모두 전달했던 백산 안희제(白山 安熙濟 선생이나, 받았던 독립자금을 모두 기록하고 훗날 찾아서 고마움을 전달했던 백범 김구 선생이나 범인으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지금 현재 위정자들의 자기 주머니 챙기는 세태[世態]와 비교[比較]해보면 가히 본받아야 할 삼백[三白] 스승이 아니겠는가? 2015년 6월 23일 석암 조헌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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